미끼는 무는 것이 아닌 삼키는 것
미끼는 무는 것이 아닌 삼키는 것
  • 김기대
  • 승인 2016.06.09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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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 리뷰

"기술의 시대에  흔적없는  주체"

영화 곡성은 감독 나홍진이 ‘미끼’라는 단어를 언론에 흘리면서 관객모독적으로 시작했다. 곳곳에 심어 놓은 난삽한 상징과 직유들은 영화 좀 볼 줄 안다는 사람들에게 많은 의미와 해석 거리를 던져 주었다는 점에서 미끼는 적절한 용어일 수 있다. 전염병과 자식을 잃어가는 모티브에서 메르스 사태와 세월호를 담으려고 했던 흔적도 보이고 감독 자신의 종교적 배경인 기독교도 포함하려는 데에 이르게 되면 솔직히 미끼라기 보다는 떡밥에 가까워 진다. 떡밥이 많은 영화는 맥거핀((MacGuffin, 영화 줄거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마치 중요한 것처럼 위장해서 관객의 주의를 끄는 일종의 속임수)투성이 같아 불쾌하다. 게다가 영화에서  ‘미끼를 삼켜 버렸네’라는 무당 일광의 말처럼 미끼를 물지 않고 삼켜 버리면 그것은 이미 미끼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잡다한 떡밥은 흘려 보내고 미끼를 삼켜 버리려고 한다. 그 때 영화는 그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 된다.

전라도 어느 한적한 마을, 기괴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얼이 빠진 듯한 범인에 의해 부부가 무참히 살해되는데 이런 사건에 상투적으로 따라다니는 ‘치정살인’으로 의심되지만 ‘과학’은 독성 가득한 버섯으로 인한 정신 분열증의 결과라고 사건을 결론 짓는다.

무명은 쫓기면서 제압하지만 ‘액’을 막아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잔혹한 사건이 계속 일어나자 시골의 어수룩한 경찰 종구(곽도원분) 는 사건의 기괴함에 의심을 갖기 시작한다.  산 속에 살고 있는 일본인이  마을로 이주하면서부터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후배 경찰의 이야기를 흘려 듣던 종구도 딸이 비슷한 증세를 보이자 본격적으로 의심을 진실로 바꾸어서 문제 해결에 나선다.  마을의 이웃들이 당하는 참변에는 경찰임에도 관찰자로  참여하던 그가 딸에게 위험이 닥치자 당사자로 나서면서 일은 더욱 꼬이게 된다.

두 번째 참극이 일어났을 때 종구는  젊은 여인 무명(천우희 분)과 마주친다. 무명은 그 사건에 대한 목격한 것처럼 사건의 정황을 설명하고 종구는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그녀로부터 찾으려 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여인은 사라진다. 이후 종구 딸을 치유하러 온 무당 일광(황정민분), 일본인 무당, 무명, 천주교 부제 양이삼  네 사람이 서로 얽히면서 누가 종구를 돕고 누가 해치는 자인가를 종구와 관객들에게 질문한다. 이 과정에서 종구와 관객들은 진짜 귀신과 진짜 구세주를 구별하기 위해 영화의 줄거리를 쫓아 간다.

먼저 일본인을 보자. 그는 한국인의 마음에 선입견으로 자리 잡고 있는 바로 ‘그’ 일본인이다.   강제징용과 종군 위안부, 마루타 실험과 같은 잔인성이 그에게 드러난다. 낯선 외지인, 그것도 일본인이라는 사실에서 이미 그는 마을의 연속적 참사의 원인 제공자로 반쯤은 이미 각인된 상태로 관객에게 다가 온다.  동시에 그는 피해자들의 사고 전과 후의 사진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 로고도 선명한 미놀타 사진기로 찍은 것이다.

사고 현장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외지인

미놀타는 한때 일본의 대표 기업으로 삼성과 제휴해서 삼성 미놀타를 생산한 적이 있고 지금은 코니카 미놀타로 합병한 상태로 일반 카메라 생산은 지난 2007년 중단했다. 그런데 오직(코니카 미놀타도 삼성 미놀타도 아닌) 미놀타 로고가 선명한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외지인은 일본이 조선땅에서 누리던 과거의 수탈과 권력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는 발전한 도시를 선택하지 않고 ‘식민지 근대화론’의 한 근거였던 무지한 시골을 택해 과거를 반추한다. 일본 속옷인 훈도시를 입고 미놀타로 사진 기록을 남기면서 19세기 일본인듯한 존재를 신으로 섬기는 그는 전통과 미래가 기괴하게 조합되어 있는 일본문화의 속성을 드러낸다.

일광은  일본인과 서로 닿아 있는 존재다.  이름부터 왜색(倭色)이 강한 그는 겉은 한국인이지만 훈도시를 입고 있으며 미놀타로 사진을 찍는다.  일본스러운 것 뿐 아니라 나이키 표식이 뚜렷한 트레이닝 복 상의(종구도 나이키를 입고 있다)를 입고 손목의 금빛 시계를 눈에 거슬린다. 또한 그가 무당의례에서 추는 춤은 전통적 무무(巫舞)가 아니라 현대식 춤에 가깝다. 그는 전통 종교의 사제이지만  제 것 보다는 모든 것에 감염된 허주다. 영화에서 허주는 신 아닌 신을 부르는 말인데 자기 정체성이 없는 일광은 허주에 가깝다. 영화에 나오는 4명의 종교인 중 일광만이 의례를 위한 돈을 요구한다.

일광의 춤은 어딘가 어색하다

무명은 가장 한국적인 존재다. 하얀 옷을 입은 그녀는 일광과 일본인을 통제하는 주술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외부의 침입은 막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참극의 원인은 알지만 직접적으로 막아내지는 못한다.  그는 춘배라는 마을 주민과 성명 미상의 술집 여인에게만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무명은 ‘할매가 그러는데’라는 말을 통해 합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할머니들의 말을 신뢰한다. 또한 감독은 종구네 집에서 종구 아내보다 종구 장모의 역할을 부각시킨다.  오래 된 것에 대한 신뢰라는 의미다.

가톨릭 부제 양이삼은 전래 2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종교라기 보다는 서구의 종교로 남아 있는 가톨릭(기독교)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두려워하는 종구 앞에서 믿음보다는 현대의학을 추천하는 주임신부는 서구 합리주의의 매개자며 부제 양이삼은 바벨탑 이후의 분리된 언어의 매개자일 뿐 귀신의 실체에는 다가가지 못한다. 실체가 알고 싶어 일본인이 숨어든 동굴을 찾는 용기는 있었지만 그를 직접 만지지 못한다.   그가 찾은 동굴은 텅 빈 공간으로서 이미 그가 알고 있던 진리를 넘어선 (라깡이 말한) 실재계다. 이 텅 빈 공간의 이미지는 건강원 주인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산에서 경험한 일의 증거라며 텅 빈 냉장고를 보여준다.  텅 빈 공간도 증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왜 사진인가? – 모방 주술과 접촉 주술"

프레이저에 따르면 주술에는 모방 주술(imitative magic)과 접촉 주술(contagious magic)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가뭄이 지속될 때 용왕을 그려  비오기를 빌었던 경우가 모방 주술에 해당되며 접촉 주술은 실제로 접촉된 사물을 통하여 주술을 거는 일을 말한다. 영화 <곡성>은 접촉에 의해 감염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인은 ‘일본스러움’에 접촉된 사람이고 접촉의 효력을 마을 사람에게 전달하려 한다. 그의 집에서는 피해자들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일광은 나이키와 금시계, 의례 비용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서구화)에 감염된 자다.  일본인은 굿(신사참배도 모두 굿이다)의 형식을 빈 일본주의자고 일광은 한국 전통 무속을 외피로 쓴 속물이다.

무명이 종구와 처음 만날 때 춘배의 군복 외투를 입고 있었으나 춘배가 산 속에서 기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을 때 그 군복을 입고 있었다. 무명은 춘배에게 접촉 주술을 건 것이 아니라 그를 정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춘배는 다시 그 옷을 입음으로 주술에 걸렸다. 민간 사회에도 작동하고 있는 군사문화를 일컫는 직유다.

그러면 사진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대적 모방 주술이다. 사진에서 현대사회의 기술문화와 미학적 측면을 동시에 발견했던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사진도 일종의 주술이다. 카메라는  모방을 기술적으로 실현시키면서 세계와의 관계가 인간 중심적  시각을 벗어나 기술의 형식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비를 오게 하기 위해 용왕의 그림을 그린다면 관찰자(주체)의 상상력과 시각이 그림에 개입될 수 있지만 사진에서는 주체가 사라지고  기술원리만 작동하게 된다.  말하자면 일광이나 일본인은 직접 그리는 부적 대신 객관적 형상인 사진에 의존한다. 가장 신비적이고 비합리적이어야 할 무당들이 사진의 현장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주체는 사라진다. 그들을 감염시킨 ‘외부’의 우연적 개입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존재가 된다.  결국 주술의 피해자인 종구네 가족이나 주술의 가해자인 무당들이나 가톨릭 신부들이 모두 ‘주체’없는 판단을 하고야 만다.

"우리 모두 귀신에게 당하며 사는 거다"

종구의 딸은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면서’라고 아버지를 타박하고 종구의 후배 경찰은 ‘소문에는 다 이유가 있다’며 소문에 의존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지옥 같은 세상이 계속되고 있다. 성장의 주술에 의해 노동자들은 갈수록 벼랑으로 내몰리고 ‘경제위기’라는 소문 속에 임금 몇 푼 더 받으려는 노동자들은 경제 위기의 주범으로 몰린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계급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세상이 만들어 낸 소문에 의존한다. 어떤 구조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이 구조가 부르는 데로 살수 밖에 없는(루이 알튀세르가 말한 호명 주체) 존재이지만 적어도 자기를 부른 구조와 이데올로기의 실체는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다.

자본주의, 군사문화, 회고주의 어느 구조가 되었던 구조는 우리를 부르면서 구조에 예속되라고 미끼를 계속 던진다. 미끼를 덥석 물어버리면 낚이는 것이다. 그것을 삼켜 버려 미끼의 효력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 이 글은 <뉴스 B>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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