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삶에 계단이 되어줄 수 있다면
누구의 삶에 계단이 되어줄 수 있다면
  • 신순규
  • 승인 2016.10.28 2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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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규 애널리스트

34년 전 나는 떠나 온 한국을,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학교 친구들을, 공항에서 어렵게 헤어진 가족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었다. 1982년 7월 혼자 미국으로 유학을 온 나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오버브룩 맹학교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있다. 기숙사 침대에 앉아서, 시끄러운 난방 시스템 소리와 진동을 비행기 엔진 소리와 진동인 듯 느끼려고 애를 썼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이란 상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두고 온 사람들이 보고 싶었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선생님들, 그리고 문화가 전혀 다른 친구들과의 학업과 일상생활이 힘들기만 했다. 

게다가 학교는 내가 기대했던 곳이 아니었다. 미국은 꿈의 땅, 기회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오버브룩은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의 학업에 대한 열정은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맹학생들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으므로, 영어를 못하는 나도 시험에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큰 고민 끝에 결정한 유학길이 잘못된 선택이었단 생각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눈치챈 기숙사 사감선생님이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녀는 주말에 차를 타고 학교 근처 공원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이 공원에서 피크닉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서, 지역 한국 사람들과 나를 연결시켜주기 위해 시작한 그 드라이브 덕에 나는 결국 학교 근처에 있는 한 한인교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분들은 내가 향수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애를 써주셨다. 일요일은 물론이고 다른 날에도 학교까지 나를 데리러 와 주셨고, 교회에는 내 또래 친구들도 있었다.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그렇게 먹고 싶었던 한국 음식도 먹고, 고등학생들이 어떻게 공부를 하고, 대입 준비는 어떻게 하는지도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가족처럼 대해주시는 분들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갑자기 뉴저지에 있는 일반학교로 전학하면서, 아쉽게도 이분들과 연락이 끊겼다. 지금처럼 값싼 장거리 전화나 간편한 이메일이 없던 그때, 편지를 쉽게 주고받을 수도 없었기에, 몇 사람의 이름과 몇 가지 추억만을 기억 속에 남긴 채 나와 그분들과의 인연이 끊기고 만 것이다.

1년 전 책 출간 후, 나는 여러 곳에서 강연 요청을 받아 왔다. 우리 회사 직원을 아들로 둔 '미세스 오'는 아들에게서 나의 책을 받아 보시고는 얼마 전 강연 요청을 해왔다. 자신의 사업 30주년 기념식에 와서 강연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눈치가 빠른 독자들은 이미 이야기의 방향을 짐작하셨을 것 같다. 맞다. 기념식에는 오래전에 나를 보살펴주신 그 교회분들이 꽤 많이 참석해 있었다. 기념식장에서 알게 된 것이지만 미세스 오의 남편은 자주 나를 데리러 학교까지 오시던 분이었다. 목소리로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강연을 했고, 열흘 후 가족과 함께 필라델피아 한인교회를 찾았다.

그런데 그분들은 여전했다. 한인교회에 외국인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지역 위탁가정에서 사는 아이들이라고 했다. 부모와 같이 살 수 없는 아이들을 데려와 먹을 것을 주고, 가르치며 보살피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미세스 오의 아들인 우리 회사 직원 에드워드는 이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매 주말 2시간 거리를,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온다고 했다. 34년 전 한국에서 유학 온 한 시각장애인 학생을 돌봤던 분들의 자녀들이 역시 낯선 이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어주고 있었다.

삶을 살아내는 것은 계단을 쌓아가는 것 같단 생각을 종종 한다. 모든 계단을 자신의 힘으로만 쌓는 사람은 없다. 포기했을 수도 있는 나의 유학 초기 계단은 그분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나의 도움으로 삶의 계단을 쌓았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나도 훗날 들을 수 있도록 오늘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순규 / 시각장애 월가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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