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나중은 미약하리라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나중은 미약하리라
  • 이승규
  • 승인 2008.04.09 14: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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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개신교 기독당·통일교 가정당, 둘 다 참패

▲ 기독당 비례대표 후보들. 기독당은 이들이 모두 국회에 진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통일교가 평화통일가정당(가정당·총재 곽정환)을 통해 정치권에 진입하려 한다는 일부 보수 개신교계의 걱정은 말 그대로 '기우'로 끝났다. 4월 9일 총선 개표 결과를 보면, 가정당은 지역구에서 당선자를 한 명도 내지 못한 것은 물론,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정당 득표에서조차 1.05%를 기록해 자진 해산의 길을 걷게 됐다. 이 당은 245개 지역구에서 모두 후보를 냈지만, 당선자는 한 명도 없었다.

기독사랑실천당(기독당·대표 최수환)도 남 보고 웃을 일이 아니다. '아무리 겸손하게 말해도 200만 표가 나올 것'이라던 최성규 목사(기독당 명예총재)의 장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금식 기도까지 했는데 말이다. 기독당은 정당 투표에서 200만 표의 4분의 1에 못 미치는 45만여 표를 얻는 데 그쳤다. 이번에는 꼭 국회에 입성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들의 기대는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어떻게 보면 가정당이 국회를 장악하려 한다는 기독당의 호들갑은 '코미디'였다. 통일교 신자는 약 5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모두 가정당을 찍는다 해도 비례대표는 한 명도 뽑힐 수 없다. 하지만 기독당은 선거 운동 기간 내내 통일교의 국회 진출을 막아야 한다고 '난리'를 쳤다. 총선에 출마할 정도의 정당이라면 당연히 정책 홍보가 우선이어야 하지만,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책은 없었다.

통일교의 핵심 인사들이 비례대표로 나선 가정당이 총선에서 얻은 1.05%(180,785표·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표 기준)라는 정당 득표율은 2004년 총선 당시 기독민주복지당이 얻었던 1.1%(약 20만 표)와 비슷한 수치다. 가정당은 정당 득표율에서 2%를 얻지 못하면 자진 해산해야 하는 정당법에 따라 해산의 수순을 밟게 됐다. 가정당 총재이자 비례대표 1번인 곽정환 씨는 통일교 교주 문선명 씨의 사돈이다.

통일교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만든 기독당 역시 가정당과 상황은 비슷하다. 모두 443,705표(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표 기준)를 얻어 2.59%의 정당 득표율을 기록했다. 가정당과 비교해 두 배가 훨씬 넘는 표를 얻었고, 지난 총선 당시 얻은 1.1%보다는 많지만,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기준인 3%에는 미치지 못했다. 비례대표 후보 10명이 모두 국회에 진출하는 것이 목표라던 정당이 받은 성적표치고는 초라하다. 그나마 자진 해산만큼은 면하게 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고, 가정당과 비교해서 우위에 놓일 만한 내용이다.

비례대표는 5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하거나 정당 득표에서 3% 이상을 얻어야 한다. 이에 따라 최소한 10석 이상을 호언장담했던 기독당과 가정당 모두 국회의원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채 총선을 끝내게 됐다.

용두사미, 가정당

▲ 가정당 역시 마찬가지다. 245개 전 지역구에 후보를 냈지만, 단 한 명도 당선되지 못했다. 정당 득표도 1.05에 그쳐 참패를 당했다. (사진제공 평화통일가정당)
출발은 가정당이 좋았다. 2007년 8월 28일 창당한 가정당은 '가정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구호로 자신들의 가치를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과 홍보 매체를 총동원했다. 이번 총선을 '가정을 살린다'는 정책을 국민에게 홍보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셈이다. 

이에 반해 기독당은 이름에 맞는 정책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저 통일교의 국회 진출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 데 급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정당처럼 기독당만의 이념이나 가치를 국민에게 알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정책이나 이념을 만들 만한 인재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광훈 목사가 지난 1월 사랑실천당을 창당했을 때만 해도 기독당은 교계에서조차 관심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사랑실천당에 참여할 인사로 자천타천 이름이 거론됐던 여러 목사도 발을 빼기 시작했다. 하지만 2월 최수환 장로가 당 대표를 맡고 있던 기독민주복지당과 합당을 선언하자 분위기는 조금 나아졌다. 당 이름을 기독사랑실천당(기독당)으로 바꾸고, 총선에 본격 뛰어들었다.

이렇게 되면서 상황도 변하기 시작했다. 가정당이 전 지역구에 후보를 내는 등 기세가 만만치 않자, 기독당에 대해 처음에는 냉랭한 눈빛을 보냈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대표회장 엄신형 목사)와 각 교단 등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통일교의 국회 진출을 막아달라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정책 실종, 기독당

이때부터 기독당의 구호도 바뀌었다. 가정당을 통해 통일교가 국회에 진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옛날 통일교가 <세계일보>를 만들자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이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국민일보>을 만들던 논리와 똑같다. 물론 <국민일보> 덕분에 통일교가 찌그러졌다는 소식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존재 가치를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방을 물고 늘어지는 전략을 똑같이 구사한 것이다.

하지만 통일교에 대응해야 한다는 명분은 목회자들에게 쉽게 먹혔다.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와 김준곤 목사(한국 CCC 명예총재) 등이 기독당 지지를 선언했다. 최성규 목사(순복음인천교회)도 명예총재로 당에 합류했다. 물론 의미 있는 정책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기독당은 정책에서만 가정당에 밀린 것이 아니었다. 세 싸움에서도 밀렸다. 가정당은 245개 전 지역구에 후보를 냈다. 반면 기독당은 서울 금천과 동작을, 충남 당진에서 3명의 후보가 출마하는 데 그쳤다. 2004년 총선에서 7명의 후보가 기독당의 이름으로 출마한 것에 비하면 반 토막인 셈이다. 비례대표의 경우 가정당은 13명의 후보를 냈고, 기독당은 10명을 내세웠다. 아무튼 이래저래 개신교나 통일교나 또 한 번 세상의 놀림감이 되기에 충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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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rofumi 2012-04-13 11:23:44
It's always a pleasure to hear from smeonoe with expert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