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십일조 논쟁- 은률과 황금률
안타까운 십일조 논쟁- 은률과 황금률
  • 최태선
  • 승인 2014.11.28 00:09
  • 댓글 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금에 못미치고 은에 머문 이유

벌써 오래 전부터 기독교 관련 클럽이나 카페 등에는 십일조에 관한 글들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은 그런 이야기가 그렇게 폭넓게 회자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또 십일조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무조항이 아니라는 성경적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거나 자신의 임의대로 구제나 기부 등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다했다고 만족해 합니다. 나아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자신이야말로 바른 신앙인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돈을 좋아하는 목사들이 자신이 가진 힘을 오용하여 교회 돈을 마음대로 유용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개혁 성향이 강한 어떤 교회의 재정 담당자는 개혁이라는 이름이 붙은 교회들은 다 찾아가 헌금 사용에 대한 글을 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현실 타개책으로서 바람직한 면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와 같은 현상이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행동들이 돈을 중요시 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거나 돈만 바로 사용하면 바른 교회가 될 수 있다는 바르지 않은 목표를 강화시켜주기도 합니다. 동시에 돈이 아까운 사람들에게 마음 편하게 헌금 안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현상들이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일들이 사랑을 심화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랑마저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지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그 필요의 이유는 사랑의 깊이를 더해주고 사랑의 넓이를 넓혀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게 보려 하고, 또 그런 분들에게서 깊어지는 사랑을 확인해 보려 해도 오히려 개인화된 자기의만을 발견하게 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률과 항금률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율법과 복음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복음에 담겨 있는 자유와 해방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가졌던 유대인들보다 결코 나아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의가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교인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진지한 믿음을 가진 종교적으로 탁월하고 그야말로 열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함은 물론 혹여라도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613개의 율법에 울타리 율법이라는 새로운 율법을 만들어 2,100여개가 넘는 법을 지키고 있습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순수합니다. 율법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열정적인 신앙인들인 유대교인들보다 그리스도인들의 의가 더 나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인들보다 더 많은 율법 조항을 만들어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은률과 황금률입니다.

 약 2,000년 전 한 이교도가 랍비 샴마이를 찾아가 자신이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유대교의 핵심을 정의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랍비 샴마이는 어떻게 심오한 유대교의 핵심을 그렇게 짧은 시간에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그같은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유대교를 무시하는 처사라 생각하고 화를 내었습니다. 격분한 샴마이는 각목을 집어들고 그를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쫓겨난 그 이교도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음에는 랍비 힐렐을 찾아갔습니다. 힐렐은 그 남자를 온화하게 대했을 뿐 아니라, 그의 질문이 타당성 있다고 여겨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도 행하지 말라는 것이 유대교 율법의 전부일세. 나머지는 그에 대한 설명일 뿐이지. 이제 돌아가서 공부를 하시게"(바빌로니아 탈무드, 사밧 31A)

 이것이 유대교 은률의 이야기입니다. 랍비 힐렐은 유대교의 핵심을 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도 행하지 말라는 것으로 압축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는 황금률로 기독교의 핵심을 요약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이든지 남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악행을 너희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은률Silver rule과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Golden rule을 비슷한 것으로 여기거나 동일시하는데, 이 둘은 실상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긍정과 부정의 차이, 혹은 금기와 자유의 차이입니다.

 긍정적인 규율은 남에게 유익을 행함으로써 그들을 돕는데 초점이 있고 부정적인 규율은 악을 행하지 않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어느 규율을 따르든 그 결과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섯부른 판단입니다. 은률은 황금률과 같이 남의 유익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악이 없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률은 사랑이 없거나 사랑이 조금 희석되더라도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황금률은 온전한 사랑이 없으면 준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률과 황금률 중 어느 것을 따르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고통스러운 조건을 제거해주는 것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선을 베푸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손을 뻗칠 뿐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은 물론이고 그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자 열망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황금률을 따르는 것은 자선이나 자비의 차원을 월씬 뛰어 넘어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샬롬'을 지향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현실과 미래

열린 세계와 닫힌 세계의 차이만큼 은률의 세계와 황금률의 차이는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반대입니다. 은률을 따르는 유대교인들은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많은 기부와 자선을 행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른 십일조를 오늘날도 넘치도록 드리고 있습니다. 그 금액을 다 합하면 수입의 23%가 조금 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그렇게 많은 십일조를 드릴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 때마다, 즉 성년식이나 가족의 중요한 모든 행사 때마다 비용을 줄여 그것을 기부와 자선에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세상을 받치는 세 개의 기둥이라고 믿고 있는 토라와 예배 그리고 자선을 튼실히 함으로써 그들 자신은 물론 세상을 위해서도 큰 공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열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게 된 새 이스라엘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과연 오늘날도 십일조를 율법적으로 드려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놓고 따지면서 액면 그대로의 수입의 십일조도 드리지 않게 됨으로써 점점 더 이기적인 집단으로, 폐쇄적인 집단으로 세상의 신망마저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열린 은혜의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드리게 된다면 그들은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수입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수입뿐만 아니라 이미 축적된 재산도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교회에서처럼 핍절한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팔아 말없이 사도들의 발 아래 내려놓는 일을 서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사도행전 4장 참조)

오늘날 기독교는 그 은혜의 세계를 거절하고 십일조를 안 드림으로써 그만큼의 물질적인 이득을 얻고 그와 함께 부담감 역시 안 느낄 수 있게 되었지만 복음에 담겨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풍성함을 송두리째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는 더 이상 넘치는 기쁨, 넘치는 소망, 넘치는 친절, 넘치는 관대함, 넘치는 용서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진정한 행복을 잃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라는 사실을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잃어버린 것은 참된 기쁨과 행복입니다. 복음과 늘 함께 하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생명력이 사라진 것입니다.

은률의 결과는 죄책감과 교만입니다. 기준에 못 미칠 경우에는 죄책감이 들고, 잘 하고 있을 때에는 교만한 마음에 자기의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자유의 법인 황금률을 주셨고, 한계가 없이 열려진 새로운 세계에서 끝없이 헌신하고 봉사함으로써 아무런 죄책감과 교만 없이 참된 행복을 느끼며 존재의 변화를 이루어나갈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십일조 논란에 빠지거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구이건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잘 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함께 공유하며,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나의 필요와 욕망을 내려놓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쁨과 행복을 깨닫고 느낄 것이며 그와 함께 존재의 변화가 이루어져 날마다 더 신실하고 겸손한 사랑의 사람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과연 나는 은률을 따르고 있을까요? 황금률을 따르고 있을까요? 아니면 은률조차도 따르지 못하고 있을까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마음에 품을 수 있다면 황금률에 접근하기가 조금은 더 쉬워지지 않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정말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5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atom 2014-12-21 07:46:23
흠.... 최근의 십일조 논쟁은 적어도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가 아닌, 신약교회시대에 해석학적으로 십일조가 성서적이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으로 압니다. 최 목사님의 주장은 이제껏 "뭐 성경에 나왔으니 하는 것도 무방, 안 하는 것도 무방, 그걸 논제로 삼지말고 다른데 신경써라" 뭐 그런 말로 들립니다. 십일조와 황금률이란 짝맞추기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바두기 2014-12-09 07:14:40
십일조논란은 결국 많다고 생각하는 자와 적다고 생각하는 자와의 끝날 수 없는 논쟁이라 생각합니다. 십일조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십분의 일이나 가져가냐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일부만 하나님께 돌려드린 후 십분의 구를 가질 수 있으니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성경에 나옵니다.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 "주인님은 주시지 않은 곳에서 가져가시는 분이라서..." 하며 해명합니다만 결과는 주인의 분노였습니다.

십일조를 논란으로 삼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고 지금 기독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척도인 것 같습니다.

atom 2014-12-02 13:00:14
결국...

십일조... 성경에 나와 있고 상당수가 아름답게 따라온 전통이 있으니, 다른 사람 신경쓸 거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너그럽게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하는 거이 '황금률'을 이루는 거이다, 좀더 말하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목적이 좋으면 성경적이냐 아니냐 복잡하게 짜질 거 없이, 괜시리 마음을 평안을 깨는 고민을 할 거 없이 깨끗하고 산뜻하게 십일조를 하라, 그러면 '복음에 담겨 있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 즉 교회에서는 넘치는 기쁨, 넘치는 소망, 넘치는 친절, 넘치는 관대함, 넘치는 용서를 체험케 된다', 뭐 그런 권유인 것으로 읽혀지네요.

그런데, '십일조와 황금률'이라... 짝이 되기에는 여전히 억지 연결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율법적인 복음'과 같은 형용모순의 주장 같은.

다시 덧붙이면, 십일조 문제와 (계급화된) 직분 문제는 한국교회를 타락시킨 주범이라는 일반 인식 이전에, 십일조가 과연 황금률 이라는 단어로 짝을 이룰 만큼 성경적이냐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겨집니다.

답답함과 참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atom 2014-12-02 12:56:00
결국...

십일조... 성경에 나와 있고 상당수가 아름답게 따라온 전통이 있으니, 다른 사람 신경쓸 거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너그럽게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하는 거이 '황금률'을 이루는 거이다, 좀더 말하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목적이 좋으면 성경적이냐 아니냐 복잡하게 짜질 거 없이, 괜시리 마음을 평안을 깨는 고민을 할 거 없이 깨끗하고 산뜻하게 십일조를 하라, 그러면 '복음에 담겨 있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 즉 교회에서는 넘치는 기쁨, 넘치는 소망, 넘치는 친절, 넘치는 관대함, 넘치는 용서를 체험케 된다', 뭐 그런 권유인 것으로 읽혀지네요.

그런데, '십일조와 황금률'이라... 짝이 되기에는 여전히 억지 같은 참 안타까운 연결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율법적인 복음'과 같은 형용모순을 묘사한 비슷한 안타까운 주장으로 여겨집니다.

다시, 십일조 문제와 (계급화된) 직분 문제는 한국교회를 타락시킨 주범이라는 일반 인식 이전에, 십일조가 과연 황금률 이라는 단어로 짝을 이룰 만큼 성경적이냐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겨집니다.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Kyle Kim 2014-11-28 01:49:51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목사에게 바치는게 아니죠.
그러므로 교회에 십일조하지 않는다고 그걸로 이렇게 딴지걸면 곤란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