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연 배우와 세스닉 수녀
장자연 배우와 세스닉 수녀
  • 김기대
  • 승인 2019.03.19 17: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단 은폐의 과정부터 밝히자

문재인 대통령은 김학의 강간 의혹 사건과 장자연 배우 사건을 조사하는 검찰 과거사 위원회의 활동 시한을 연장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묻힐 뻔한 두 사건의 조사를 두 달 간 더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연장이 청신호만은 아니다. 두 사건 모두 공소시효가 지났을뿐더러 특히 장자연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석연찮은 자살로 생을 마감함에 따라 심층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김학의에게 특수강간을 적용하면 공소시효를 15년으로 연장할 수 있고 장자연씨의 경우 강제 추행치상을 적용하면 이 또한 가능하지만 장자연 씨의 경우 그것을 증명하기 어렵다.

최근 장자연씨가 추행 당하던 현장을 목격했던 윤지오씨가 용기있게 나서면서 일단 사건이 새로운 국면 에 접어들었다. 윤씨에 따르면 세간에 장자연 유서라고 알려진 문건은 유서가 아니라 장씨가 소속사 및 그를 폭행한 인사들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준비한 문서라는 것이다.

고 장자연씨의 동료인 윤지오씨가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증언을 하고 있다(사진:뉴스공장 화면 캡처)
고 장자연씨의 동료인 윤지오씨가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증언을 하고 있다(사진:뉴스공장 화면 캡처)

장씨는 죽기 며칠 전 배우 김민선(지금은 김규리로 활동)에게 연락을 취하려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가까운 관계도 아닌 김민선씨에게 연락을 취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김민선씨는 광우병 발언으로 보수 언론으로 부터 집중 포화를 받은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그 부분에 조언을 구하려고 연락을 시도했을 수도 있다. 싸움으로 끌고 가려는 장자연씨 의중이 있었다고 보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일반인들이 자연스럽게 유서라고 받아 들였던 그 문서에는 지장과 날인, 날짜까지 쓰여 있었다. 누가 유서에 지장과 날인을 하겠는가? 처음부터 이 사건은 거대한 세력에 의해 조작되고 은폐되었음에 틀림없다. 고발뉴스 이상호기자는 국정원 개입을 밝혀냈고 조현오 당시 경기지방 경찰청장은 조선일보로부터 조선일보 관련 사실을 빼달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한국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조선일보와 그밖의 세력들의 권력이 존재하는한 안타깝게도 두 달 후에도 큰 소득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장자연씨를 살인 피해자로 인정할 경우 공소시효가 없어져 장기 수사가 가능하지만 정황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손놓고 권력자들의 추악한 과거를 그냥 놓아줄 것인가? 일단 은폐의 카르텔을 얕잡아 봐서는 안된다. 지금 일부 팟캐스트와 진보언론은 황교안(김학의 사건), 조선일보 관계자(장자연 사건)를 직접 겨냥하고 있지만 이들을 엮어넣기는 쉽지 않다. 일단 한 단계 낮춰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했던 중간선을 겨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건을 잊지 말고 길게 끌고 가야 한다. 물론 진실이 최종적으로 밝혀지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가해자가 사망해서 처벌이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벌이 아니라 진실이 드러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사건을 끝까지 파야 한다.

고 장자연(좌)와 세스닉 수녀(우)
고 장자연(좌)와 세스닉 수녀(우)

50여년 전인 1969년 11월 20일 볼티모어에 있는 가톨릭계 키어(Keough)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세스닉(Catherine Cesnik)수녀는 오후 8시경 숙소를 나서 5마일 정도 떨어진 쇼핑몰에 갔다가 그 길로 실종됐다. 실종된 다음날인 11월 21일 새벽에 세스닉 수녀의 차가 숙소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숙소 주차장을 바로 앞에 두고 차는 도로에 비정상적으로 주차되어 있었고 그 안에 세스닉 수녀는 없었다. 이듬해 1월 3일 숙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의 쓰레기 소각장에서 뒷머리에 둔기를 맞은채 사망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42년생이니 스물 여덟의 젊은 나이에 학생들의 존경을 받던 젊은 교사가 피살된 것이다.

사건은 경찰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영구미제 사건이 되었다가 넷플릭스의 사건 관련 7부작 다큐멘터리 ‘The Keeper’(2017년작, 한국 넷플릭스에는 ‘천사들의 증언')를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다큐는 당시 학생들의 증언과 주변 정황에 기초해 그 학교 교목이었던 존 메스켈 신부(John Maskell)의 성폭행과 폭력성을 보여주고 있다. 메스켈 신부는 볼티모어 경찰의 경목 신부이자 메릴랜드 주방위군, 메릴랜드 주 경찰의 경목신부이기도 했고 동생 토미 메스켈은 볼티모어 경찰서장이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제인 도(Jane Doe)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삼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죄책감'을 가지고 상담을 받으러 메스켈 신부를 찾았을 때 그는 죄를 씻어야 한다며 성폭행을 시도했다. 이후 폭행은 여러 차례 지속되었고 자위 도구를 가지고 그녀를 폭행하기도 했다. 이 다큐에는 제인 이외에도 다른 학생들의 증언도 다수 나온다. 당시 남학생은  메스켈 신부가 총을 차고 다녀서 “왜 신부님이 총을 차고 다니냐”고 물었을 때 감히 너 따위가 질문을 한다며 남학생을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 보았다고 기억했다. 피해자들 중에는 메스켈 신부가 데려온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증언도 있다. 신부와 경찰의 유착이 확실해 보이는 지점이다.

실종 하루 전날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한 여학생이 세스닉 수녀를 방문했다. 이어 메스켈과 또 다른 신부가 예고도 없이 세스닉 수녀를 찾아와 협박하고 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세스닉 수녀의 폭로를 두려워한 메스켈 신부 또는 그 주변의 인물이 살해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세스닉 수녀가 살해 당한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조이스 말레츠키라는 20대 여성이 실종된 사건이 발생했다. 말레츠키의 차도 세스닉 수녀의 차와 마찬가지로 빈 채로 발견되었고 다음 날 말레츠기는 다른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 역시 미제로 남아 있는데 학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인물을 살해함으로써 연쇄 살인범의 범죄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하고 ‘더 키퍼스’는 추정하고 있다. 만약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말레츠키는 아무련 연관도 없이 악의 은폐를 위해 희생된 것이다.

'지키는자', 우리는 피해자가 궁금하지 않습니다.

세스닉 수녀 사건은 장자연 배우 사건과 매우 흡사하다. 권력이 작동하고 있었고 대중의 관심을 옮길만한 다른 사건이 발생한 것도 그렇다. 

윤지오씨가 영화 ‘더 킹’의 대사를 빌어 “이슈로 이슈를 덮는다”고 했듯이 장자연 사건이나 김학의 사건이 부각될 때마다 다른 사건이 튀어나온 것은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장자연씨나 김학의 피해자들, 정준영의 동영상에 나오는 피해 여성들이 모두 피해자들인데 왜 버닝썬 사건이 덮는데만 이용된다고 주장하느냐며 비판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김학의 사건이 처음 불거졌을 때의 연예인 사건(도박, 여가수 노출 사진 등)을 돌이켜 보면 이슈로 이슈를 덮는다는 의혹이 지나친 음모론은 아니다.

이번에도 난데없이 인기 TV 방송인 ‘1박 2일’ 출연자들의 2년전 내기 골프 대화 내용이 뒤늦게 알려졌다. 다행인 것은 이번의 경우 버닝썬 사건에 모든 언론이 과다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학의와 장자연 배우가 묻혀지지 않았다. 대중들은 이제 그런 류의 음모(만약에 있다면)에 휘둘리지 않을만큼 성숙해 져 있다.

‘더 키퍼스’는 많은 점을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용기있는 증언, 그 증인들을 향한 주변의 따뜻한 시선, 50년이 지나도록 밝히려는 열정이 범인에 대한 처벌이 불가능한 시점이 되어도 진실을 밝혀 낼 수 있다. 제인 도는 성사를 집례할 수 있는 평신도 사역자(Eucharistic Minister)로 일하고 있다. 그가 가톨릭 교회를 떠나지 않은 점이 인상적이다. 주변의 따뜻한 시선 때문일 것이다.

정준영 사건에서 ‘우리는 피해자가 궁금하지 않습니다’라며 동영상의 확산을 막으려는 네티즌들의 성숙함이 돋보였지만 최악의 경우 확산되었다고 해도 동영상에 나오는 피해 여성들을 감싸 안아야 하는데 그들을 관음증적으로 소비하는 풍조가 아직 우리 사회에 분명히 남아 있다. 존 메스켈 신부는 2001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음로론자라는 ‘주류’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끝까지 우리의 기억 속에 남기려고 노력하는 김어준 김용민 주진우 같은 ‘비주류’ 언론인들의 노고와 60만이 넘는 청와대 청원인들의 참여에 박수를 보낸다. 이제 우리 모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키는 자(The Keeper)'가 되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