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를 통해 본 생일과 제사의 차이
세월호를 통해 본 생일과 제사의 차이
  • 김기대
  • 승인 2019.04.17 02: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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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기준으로 영화 생일의 누적 관객수는 79만명이다. 지난 4월 3일 개봉했으니 아주 초라하지는 않지만 만족할만한 관객 동원은 아니다. 일단 세월호 폄훼세력들은 제쳐 놓고, 주변에 <생일> 이야기를 하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못보겠다는 대답들이 많다. 마치 의무감에 보아야 할 듯한, 그러나 의무감이 슬픔의 두려움을 압도하지 못해서 관람을 주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극적 완성도도 있고 전도연 설경구라는 두 주연배우의 연기도 좋고 세월호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나온다고 해도 믿지 못하는 눈치다. 영화관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억지로 눈물을 쥐어짜는 신파 영화도 아니다. 어떤 이는 또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날 바다>를 극영화로 만든 거겠지.” 다 아는 이야기니 재미와는 거리가 멀겠다는 추측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영화 '생일'의 한장면
영화 '생일'

김지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그날 바다>는 세월호 침몰과 구조의 실패, 그리고 거기 얽힌 풀리지 않은 의혹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다.  반면 <생일>은 침몰원인과 진상규명, 의혹 등에 목소리 높이지 않는다. 아들 수호를 잃은 엄마 순남(전도연)의 슬픔을 견뎌내는 방식을 다룬 영화다. 그날 사고때 남편 정일(설경구)은 베트남에 있어서 오지 못했다. 영화 트레일러만 보고 요즘 세상에 베트남에서 못 온다는게 말이 안되는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던데 감독은 그런 문제 제기하는 이들처럼 어리석지 않다.

이런 반응들을 보면서 세월호를 이해하는 우리의 방식도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온 세 명의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위로처럼 모두 맞는 말 같은데 정작 욥에게는 해당안되는 삐걱거림이 우리들에게도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가 유족들을 더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 폄훼세력들에게는 욕 한사발을 던지면 그만이지만 이해한답시고, 슬퍼한답시고 나선 우리들의 모습도 영화를 대하는 자세처럼 다양해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유가족들에게 슬픔의 정형성만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을 틀에 가두어 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함께 울어주기는 했지만 웃어 주지는 못했다. 의무감과 죄책감이라는 자기 감정이 그들을 향한 공감보다 앞서지 않았는가? 각종 의혹을 학습하고 나서는 세월호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전문가 행세를 하지는 않았는가?

<생일>의 감독인 이종언 감독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생일>에는 제작자인 이창동 감독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종언 감독이 이창동 감독의 <밀양>과 <시>에서 연출부와 스크립터로 참여했으니 이창동의 흔적은 당연한 것이리라.

이창동은 원수 같은 가족과 따뜻한 이웃의 관점에서 영화를 풀어나가기 좋아한다. <박하사탕>(1999)에서는 현대사의 비극에서 악역을 담당했던 영호(설경구)가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고 죽음에 이르는 영화다. <시>에서는 양미자(윤정희)가 키우던 외손자의 성폭행 가담 사실을 알고 가해 소년들 가족과 한편이 되어 피해자를 회유하려다가 결국에는 외손자를 경찰에 고발한다. 처음에는 가족을 먼저 생각하다 이웃에게 눈떴기 때문이다. 이웃에 눈떠가는 과정과 양미자의 치매 진행과정이 함께 가는 것이 영화의 묘한 역설이다. <오아시스>(2000)에서는 가족에게 모두 버림받은 3류 문제아 홍종두(설경구)와 중증 뇌병변 환자 한공주(문소리)의 사랑을 다룬 영화다. 한공주의 가족에게 한공주는 아파트 특별분양을 받는데 사용되는 도구에 다름아니다. 

<생일>에서도 가족의 갈등은 의미있는 소재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아들을 그날 사고로 잃고 순남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유가족 모임의 다른 부모들이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도 참아내지 못하고 그들에게 소풍나왔냐고 쏘아 부친다. 사업을 핑계로 늘 바쁜 남편의 빈자리를 대신하던 아들은 엄마도 순남씨라고 부를 정도로 속깊은 아이였다. 국내에서도 바삐 지내던 정일은 어느날 작은 아버지에게 빌린 6천만원과 아파트 한채를 남겨두고 훌쩍 베트남으로 떠났다가 뜻하지 않게 감옥살이를 하면서 비극의 날에 아내와 함께 하지 못했다. 아들은 떠났고 3년만에 돌아온 남편과는 이혼을 준비 중이고 초등학교 1,2학년 쯤 되었을 딸 아이도 순남의 화풀이 대상이 된다. 필요한 가족은 옆에 없고 옆에 있는 가족은 필요없다. 

이처럼 어느쪽에도 끼지 않고 혼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견디던 순남에게 유가족 모임에서 아들의 생일 파티를 열어주자고 제안한다. 유가족 모임과도 거리를 두고, 유가족 지원 단체를 뭔가 얻을게 있어서 접근하는 사람들쯤으로 바라보던 순남은 슬픈 기억 속에서 기쁨을 발굴해낼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제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순남은 남편에 대한 미움 속에서도 시아버지의 제사상을 차린다. 그러나 제사에 참석한 작은 시아버지의 보상금 발언에 순남은 아파트 단지가 떠나가도록 넋놓아 오열한다. 세월호와는 관계없는 옆집 여인은 벽너머로 들려오는 잦은 오열에 분노한 남편과 딸을 제쳐두고 이 오열에 익숙한 듯 달려와 순남을 껴안아 준다.

이 과정에서 ‘가족’도 위로가 되지 못함을 깨달은 순남은 똑같은 슬픔을 당했던, 그러나 표현 방식은 조금씩 달랐던 이웃들에게 마음을 열고 아들의 생일 파티를 연다.

<생일>에서 ‘아들의 생일’과 ‘시아버지 제사’는 상징적인 대립항이다. 정일과 순남의 세대가 지나가면 장남 수호가 죽었으므로 더 이상의 제사는 사라진다. 죽은 이들을 향한 기억은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이고 기억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후손들의 욕망이다. 그래서 형식적인 의례가 지나고 나면 덕담의 탈을 쓴 욕망이 마구 분출된다. 땅값, 투자, 승진, 진학 등등.  모든 제사가 그렇다. 순남이 차린 제사도 마찬가지여서 보상금이 대화의 주제가 되면서 결국 작은 시아버지와 정일이 충돌한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제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잊을 때도 되지 않았냐고 말하는 이유는 제삿날로는 기억해 줄 터이니 그냥 보상금 받고 가족 단위에서 죽음만 추모하라는 의미다. 

문제는 세월호 유족편에 서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날을 죽음의 날인 제삿날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는 살아있는 기억이어야 한다. 제사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욕망이 대신하는 자리가 아니라 삶이 끝까지 기억되는 자리여야 한다. 희생자를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 기억하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상을 끝까지 규명해서 정의를 세우는 ‘삶의 날’(생일)이 되어야 한다. 영화 <생일>은 진상규명을 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생일’의 은유를 통해 진상규명이 필요하지 않냐고 조용하게 설득한다.

유가족들은 돈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는 피폐해진 세상에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고 우리를 일깨워준 참 이웃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우리가 그들의 이웃으로 끝까지 남아야 한다. 우리의 연대가 지치지 않기 위해서는 제사가 아니라 생명에의 경외를 우리안에 남겨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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