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서 책을 읽다(방자전) -변學道와 김學義
영화관에서 책을 읽다(방자전) -변學道와 김學義
  • 김기대
  • 승인 2019.04.0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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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책을 읽다(4) -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두 사람 이름이 참 좋다. 한 사람은 학문으로 진리(道)를 깨닫고 다른 사람은 학문으로 의(義)를 이루니 말이다. 소설 속 인물과 실존 인물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둘은 한 때는 이름값을 했다. 변학도는 과거에 급제해서 남원 부사에 부임했다. 남원은 조선시대 담양 곡성 등 9개의 현을 관할하는 꽤 큰 지역이었다.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에서 12,000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은 남원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변학도는 조그만 동네 사또가 아니었는데 그만 춘향을 탐내다가 신세를 망치고 말았다.

의는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맡을 수 있는 인재로 거명되었었지만 모든 검사의 꿈인 두 자리를 거치지 못하고 고등학교 1년 후배(사시는 오히려 1년 선배)인 황교안이 법무부 장관이던 시절 법무부 차관이 되었다가 ‘성폭행 의혹 동영상’으로 9일만에 낙마하고 말았다. 그때 불거졌던 시비가 무혐의로 처리되고 공소시효가 끝날만큼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던 때에 다시 법과 여론의 심판 앞에 섰다. 태국으로의 도피극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온갖 망신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로 인해 무죄 추정의 법칙을 적용하려고 해도 이미 대중들의 생각 속에는 유죄로 자리잡았다. 자신이 떳떳하다면 그것을 널리 알릴 일이지 한 밤 중에 변장하고 태국행 비행기표를 현장에서 구매해 나가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화 방자전의 한 장면. 송새벽(우측)
영화 방자전의 한 장면. 송새벽(우측)

과거 급제와 사시 합격, 둘 다 아무나 마음만 먹는다고 해서 통과하는 시험이 아니다. 그만큼 어렵기에 과거 급제와 사시 통과에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따라 다닌다. 일단 통과하면 출세는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꿈꾸는 진리와 의를 이룰 수 있는 자리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왜?

“저는 목표가 뚜려대요”(뚜렷해요). 영화 방자전에서 변학도 역할을 맡은 배우 송새벽은 두 손으로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동작을 하면서 이몽룡(류승범 분) 앞에서 과거 급제자로서의 포부를 밝힌다. 방자전은 이몽룡의 종인 방자(김주혁 분)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춘향전을 비튼 영화인데 여기서 이몽룡과 변학도는 과거급제 동기로 나온다. 두 사람은 합격이 확정된 뒤에 서로 통성명을 하면서 술잔을 나누는데 이 자리에서 변학도가 이몽룡에게 한 말이 바로 이 말이다.

변학도는 권력으로 모든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로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다른 춘향전 영화에서 변학도 역할을 포악하게 생긴 배우들이 맡았던 것과 달리 송새벽은 여리고 뭔가 부족한 모습이다. 여자만이 그의 목표다.

영화 방자전 포스터
영화 방자전 포스터

이몽룡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 과거를 치르러 남원을 떠나기 전 춘향(조여정 분)에게 연정을 품어 왔으나 춘향의 마음이 방자에게 가 있던 것을 눈치챈 이몽룡에게는 춘향과 방자에 대한 복수심 밖에 남은 것이 없다. 권력으로 춘향을 정복하고, 방자 앞에서 네가 아무리 춘향의 마음을 뺏어 봤자 어차피 춘향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으스대고 싶은 열등감이 이몽룡에게 가득 차 있다. 그는 변학도와의 첫 만남에서 넌지시 춘향의 이야기를 건넨다. 대리 복수의 미끼를 던진 것이다.

이몽룡은 남원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주막을 차린 향단(유현경 분)에게 들러 춘향에 대한 복수심과 방자에 대한 열등감을 향단에게 배설한다. 변학도와 마찬가지로 이몽룡도 지질한 남자이기에 배우도 역대 춘향전의 수려한 이몽룡과는 느낌이 다른 류승범이다.

남원에 부임한 변학도는 지역의 토호 세력들과 파티를 벌인다. 김의의 동영상을 보지 못했지만 별장 파티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부임축하 파티다. 처음에 토호세력들은 변학도에게 공부만 하고 자랐으니 이런 문화가 어색하지 않냐고 묻는다. 처음에 쭈볏거리던 변학도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부사의 권력으로 순간 파티장을 장악한다. 그날 별장에서도 이러했을 것이다. 업자들은 슬쩍 김의의 ‘모범성’을 건드렸을 것이고 김의는 그런 분위기에서도 자신이 '잘 노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 기꺼이 동영상에 자신을 내맡겼다.

권력의 사용에도 분야가 있는 법인데 권력을 차지한 남성들은 자신이 모든 분야에서 능력자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 중 여자는 가장 손쉬운 권력 향유의 대상이다. 그들에게 처음부터 여성은 인격의 대상이 아니라 소유물이다.

W.H 블랑샤르는 공동의 성적 대상을 가운데 두고 집단이 함께 성적으로 흥분하는 상태가 되는 일은 동성애적 함의를 지닌다고 말한다. 이 언급은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아니라 상대 여성이 아니라 가해 남성들 사이에서 자기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정확한 지적이다. 여성이 아니라 남성 사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그릇된 욕망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에서 수전 브라운밀러는 강*간은 남자만 출입가능한 간부식당에 들어가는 일, 남자들끼리 모여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성취가 불가능한 하위계층에게는 “여성의 몸에 접근하는 일이 그들에게 가능한 선택지인 것이다.” 반면 상류층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우위성을 확보함으로써 남성연대를 공고하게 만든다.

“남성들이 짝이나 패거리를 이루어 강*간을 할 때, 피해자에 대한 물리적 힘의 우위를 더 확실히 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집단 강*간은 단지 남성이 한 여성woman을 정복하는 행위가 아니라 남성들이 대문자 여성Woman을 정복하는 행위이다.”(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한 여성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열등감이 이렇게 표출된다는 의미다. 

때문에 라캉은 본질적으로 '성관계는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주체와 대상, 상징계 등 정신분석학에서 사용되는 명제다. 성관계는 타자와 관계를 통해 향유를 누리는 일인데 그 향유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므로 실제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디우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섹스에서 당신은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결과적으로 당신 자신과 관계를 맺게 될 뿐입니다. 타자는 당신이 쾌락의 실재를 발견하는데 이용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사랑 예찬)

그러므로 김의와 변학도의 행위는 섹스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변학도는 ‘실패’했지만 이 땅의 지체높은 많은 사람들은 폭력으로 자기 배설을 하고 자기 지위를 확인하고 나서는 그걸 섹스로 여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폭력이 끝난 후 이 사건을 오히려 착취와 모욕의 무기로 사용한다. “남성이 자신의 성기를 두려움을 일으키는 무기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은 불의 사용과 돌도끼의 발명과 함께 선사시대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아야 한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그들의 의식은 선사시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에게도 차이는 있다. 변학도는 고문을 통해서라도 춘향의 몸과 마음을 얻으려고 했다. 다시말해 고문에 굴복했을지라도 춘향의 깨어 있는 육체와 교감하고 싶었다. 기생이지만 한 '인간'의 굴복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와 달리 그날 윤중천의 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만약 피해자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약물에 중독된 상태로 당했다. 그들에게는 여성의 숨쉬는 반응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교감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냥 사물이었다. 어떤 피해자는 가해자 중 한 명이 수간(獸奸)을 강요했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증언했는데 ,이 또한 사실이라면, 그들이 여성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그들은 ‘나는 무엇이든 해도 돼!’라는 권력에 중독되어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영화 

방자전, 김대우 감독, 2010년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오월의 봄, 2018년
성*관계는 없다,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김영찬 외 옮김, 도서출판 b, 2013년
사랑 예찬, 알랭 바디우 지음, 조재룡 옮김, 길,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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