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오류
교회의 오류
  • 박충구
  • 승인 2019.04.18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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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구 교수의 사순절 묵상] 예수생각-4

죄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은 '믿음을 통한 구원'에 있다. 그것을 '칭의'라고도 한다. 루터식의 표현은 믿음으로 얻은 '낯선 의'다. '마귀의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준다니 참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낯설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회개나 성화 혹은 완전이라는 다양한 신학적 개념들이 있다. 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칭의 사건을 마술적으로 가르치는 미신이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성향은 '마귀의 자식'을 '마귀의 자식'으로 그대로 버려두는 '효과가 없는 칭의'를 남발한다. 따라서 이명박, 이승만의 행적을 보면서 우리는 "칭의로 의로워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라며 되묻는 회의주의자들이 된다. 하나님의 교회를 측근 장로들과 모의하여 자식에게 넘겨주고 평생 후견인 노릇하며 떵떵거리는 대형교회 목사를 보면서 우리는 저들이 가르친 '칭의'의 진의가 무엇인지 더 깊이 회의하게 된다. 정신적으로 사기를 당한 것 같아 그 목사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결국 교회를 떠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칭의'는 현대 기독교인의 걸림돌이다. 칭의 사건은 예수의 제자들에게서도 일어난다. 그들은 예수를 배반하고 도망쳤다. 제국의 질서가 너무나 강고하여 저항할 수 없었고, 결국 모든 희망을 버리고 제국의 질서로 돌아갔다. 어느 제자는 낙심하여 엠마오 길로 내려갔고, 어느 제자는 본업으로 돌아갔다. 어느 제자들은 너무나 두려워 문을 잠그고 칩거했다. 제국의 질서에 반하지 않으려 그들은 ”안전과 생존“을 도모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의 제자의 길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 '예수의 부활 사건'이다. 예수가 죽음으로써 마귀의 세력이 궁극적으로 승리한 줄 알았는데, 예수가 다시 살아났으니 마귀의 세력이 궁극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고 믿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패배자의 길에서 예수의 길로 다시 돌아왔다. 탈제자의 길에서 길을 바꾸어 예수의 제자의 길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제국의 질서에 순응하는 안락한 삶을 살지 못하고 대부분 순교의 길을 갔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며, 그의 옷을 나누는 현장을 피하여 도망침으로서 예수를 처형당하도록 버려두고 도망쳤었다. 그 중 하나는 닭소리를 듣고 슬피 울던 자였다. 그런데 그들이 달라졌던 것이다. 이렇듯 ”제국의 질서“를 두려워하다가 '예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온 개별적 사건이 '칭의'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고, 예수를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언어로 이 사건을 설명하려니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학자의 눈으로 부활절 사건을 설명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그 길로 가면 합리적 사유를 포기한 미신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견에 대하여 눈을 부라리며 이런 미신적 신앙을 칭송하는 이들도 많지만 나는 그래봐야 그저 유아기적인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도망쳤던 예수의 제자들이 '변화된 이유'를 성서는 '예수의 부활'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활사건 이후 제국이 가진 권력과 위세에 대한 두려움을 이긴 자들이 다시 돌아온 예수의 제자였다. 실패하고 배반하고 자책하던 자가 예수의 제자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그릇됨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제자의 삶'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제국이 자랑하는 권력과 위세를 가진 자들을 ”성공한 자”로 간주하는 제국의 자식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네그리가 말했듯이 제국은 국경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끝없이 국경을 넓히기 때문이다. 제국은 중심부와 주변부를 나눈다. 왜냐하면 주변부를 착취하여 중심부를 살찌우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폭력이 지배한다. 내가 오늘의 교회주의를 종교라는 옷을 입을 제국주의와 닮았다고 보는 이유다. 원래 예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런데 이 말을 신학적 사유가 약한 목사들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너희가 교인이 되리라”라고 가르친다. 교회가 흔히 범하는 오류다. 심지어 '예수의 제자 교육'을 한다면서 그 짓을 한다. 그리함으로써 자기 교회를 제국의 교회처럼 끝없이 확장시킨다. 다른 교회를 파괴하는 일엔 죄책감 1도 없다. 이들은 칭의를 가르치면서도 사회 정치 경제적 차원에서 '제자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이명박 이승만 같은 이를 편드는 교인을 만들 뿐이다. 부활절을 전대미문의 기적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교인을 생산하는 이들의 성실성을 나는 잘 믿지 않는다.

오직 소수의 교회에서는 교회주의적인 칭의를 벗어나 '제자의 삶'으로 향한 칭의를 가르친다. 제자의 삶을 교회생활과 동일시하는 교회주의는 결국 제국주의의 덧에 빠진 위선적 경건으로 일관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전통이다. 소위 자기 성찰적 소종파라고 내가 분류하는 전통이다. 다양한 종파 중에는 신학의 역사를 왜곡하고 카리스마적인 종교 지도자의 광기에 사로잡혀 과도한 종파주의를 도모하는 집단도 적지 않다. 하지만 성찰적 소종파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제국주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을 제국주의를 이기는 왕중의 왕이라고 경주하듯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제자의 삶에는 정의, 정직, 겸비, 청빈, 평화, 평등, 자유의 길이 이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제국의 논리에 빠진 마귀의 자식의 길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로 돌아선 모습을 다분히 찾아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평화의 예수'(김근수 저, 동녘, 2018)
'평화의 예수'(김근수 저, 동녘, 2018)

죄의 깊이나 사죄의 복음을 모르는 학자의 소리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나, 내 생각에는 교회를 사고팔고, 하나님의 교회를 제 자식에게 사업장 넘겨주듯 넘겨주고, 조야한 정치 선전장으로 만들며, 장로 권사 집사 직을 팔아먹는, 중세 교회가 면죄부 팔아먹듯 헌금을 받는, 각종 추태를 부리면서 던지는 비난은 정중히 사절한다.

사순절 한 가운데 시점에서 예수 생각을 하면서 일기를 쓰듯 쓴 것이니 저런 생각을 하는 이도 있구나 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다. 페친 중에서 교회생활하면서 너무나 많은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늘 죄스러운 마음을 가져왔다. 나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신학자라고 목사라고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외로워하지 마시기 바란다. 나는 아직도 모든 이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길을 잘 모른다. 뜬금없는 신학적인 질문은 2000년 얽힌 실타래에서 명료한 답을 내놓으라고 하시는 것과 같다. 궁금하시면 좋은 책을 구입하여 읽으시기 바란다. 매우 궁금하신 분은 김근수님이 쓰신 <평화의 예수>(동녘, 2018) 일독을 권한다.

박충구 교수 / 전 감신대 기독교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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