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세계사적 맥락으로 본다면?
한국 근현대사, 세계사적 맥락으로 본다면?
  • 박노자
  • 승인 2019.05.21 0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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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교육의 아주 큰 폐단은, 세계사와 자국사, 즉 한국사를 따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세계사는 대개 선택 과목이고 선택하는 경우도 많지 않고 하니까 일반적인 고졸, 대졸은 '광무개혁'이나 '한일 합병' 내지 '우리 나라 경제성장, 산업화, 민주화'를 어렵풋이 알아도 이 일들의 세계사적 맥락을 까막히 모르는 것입니다. '

인식론적 민족주의라고나 할까요? 이런 식으로 배우면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은 어떤 세계사적 맥락과도 무관하게, 오로지 '우리'만의 자랑 내지 '우리'만의 수치가 되고 말지요. 더군다나 그 '우리'라는 범주 안에 예컨대 연변조선족이나 구쏘련 고려인들은 아예 포함되지 않고, 북한사도 매우 단편적으로만 언급됩니다. 결국 '대한민국 사람'은 학교 과정만 착실히 밞으면 오로지 대한민국의 통치자와 '지식인'들이 서술해준 '대한민국만의 과거'밖에 잘 모르는 인간이 됩니다. 북맹 (북한을 잘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도 그렇지만 예컨데 동남아 여행 다니면서 "그런 데도 역사가 있느냐"고 순진히 묻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실로는 한국사를 세계사적 맥락에서 가르친다면 훨씬 더 재미있고 훨씬 더 교육 수요자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잘 자극시킬 수 있는데, 아직 역사학계도 일제 시대식으로 '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삼분화돼 있는 상황에서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일제 시대 관학자들에게야 '세계 무비의 만손일계 천황을 모시는 신들의 나라인 일본'의 과거를 어떤 보편사적 맥락에서 가르치는 것은 '이단'으로밖에 안보였겠지만, 우리는 과연 지금도 그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요? 좌우간, 보편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본다면 몇 가지 중요한 지점들은 보입니다.

국가 주도의 개발

남북한 사이의 수많은 공통점 중의 하나는, 양쪽의 초고속 개발이 바로 '국가'에 의해서 견인됐다는 것입니다. '5개년 계획' 같은 형태를 아예 양쪽이 공동적으로 채택했습니다. 차이라면 북에서 국가가 경제를 '소유'까지 하는 반면 남에서는 처음 개발경제 소유권의 대부분을 재벌에다 맡겼다가 나중에 (1990년대 이후) 국가 자체가 재벌의 행정서비스센타처럼 돼버린 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이와 같은 국가 주도의 개발이란, 한국 근현대사의 '장기추세'이기도 합니다.

일제 시기도 관 주도의 경제이었지만, '관 주도'라는 틀은 실은 이미 대한제국 시절에 나름 확립됐습니다. 광무 시절에 관 주도 개발의 중심은 궁내부이었고, 궁내부 소속의 서북철도국 (광무4-8년) 등은 관 주도 개발을 이끄는 '관영 공사'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영친왕이 바지사장으로 있고 실제로는 서북철도국과 마찬가지로 이용익이 실세로 있었던 대한천일은행 (1899년 이후)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관치 금융'의 시초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고종과 이용익 등은 가까이 일본의 관 주도 개발 모델을 참고했지만, 크게 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신자유주의 도입 이전까지 일부 핵심부 국가 이외에는 관 주도 개발의 "세계적 대세"이었습니다.

새로이 통일된 독일은 그 상징이었고, <비사맥전>처럼 독일의 관 주도 개발의 상징인물인 비스마르크의 생애를 그리는 책들은 구한말 지식인층 사이에 베스트셀러이었습니다. '5개년 계획'은 인도 같은 나라에서도 1990년대 전까지 활용됐고, 관치 금융 (공업 부흥을 이끌기 위해 국가가 정한 인위적으로 낮은 기업체에의 대출 이자율 등)은 핀란드에서 1980년대말까지 당연시돼왔습니다. 만약 남북한 산업화의 역사를 이와 같은, 세계사적 시야를 고려한 방식으로 서술해주면 오히려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3.1 운동 

1919년은 세계사적으로 1848년이나 1968년 같은 "지구적 반란의 해"이었습니다. 그 해 반란들의 역사는, 지구인들이 사는 오늘날 현실의 '기반'을 조성해준 것이죠. 1919년 암리트사르 학살로 잘 알려진 인도 독립 운동의 폭발은 오늘날 같은 "제3세계 강대국" 인도의 건국으로 이어지고, 중국의 5.4운동은 결국 '신중국' 건설로 이어졌습니다. 러시아를, 1919년에 박위군과 고전 중이었던 볼세비키정권의 후계세력들이 지금도 통치하고 있죠. 반면, 미국에서의 대량적 파업 운동 (1백만 명 이상 참가자)이나, 독일, 헝가리, 이태리 등에서의 급진적 (사회주의적) 혁명 시도들이 처참하게 진압됐습니다.

3.1운동은 그 세계적 반란의 인환이었고, 그 지도부 중에서는 특히 만해 한용운 등은 독일, 러시아 혁명에 아주 크게 고무됐습니다. 단, 독립을 '청구'하듯 하는 운동의 다수의 보수적 지도자와, 독립뿐만 아니라 소작지 아닌 자기 땅까지 가지고 싶었던 많은 민초 시위자 사이에서의 '거리'는 엄청났습니다. 결국 이 '거리'에서 태어난 것은, 바로 만세 시위 경험했던 사람들이 처음 만든 사회주의 운동이었습니다.

남북한 경제 개발 비교론

북조선 경제가 위기에 봉착한 것은, 동구권 전반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 중후반입니다. 북조선과 마찬가지로 서방에서 빌린 외채를 갚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폴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위기는 그 유명한 1981년 정치적 위기국면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50-60년대에 대단히 잘 나갔다가 70년대에 접어들어 위기에 빠진 이유도 엇비슷했습니다. 양적 확장 (새 공장 건설 등)의 한계점에 이미 왔으며, 질적 개선, 즉 서방시장에도 내다팔 수 있는 고양질 제품의 생산에 필요한 핵심부로부터의 집중적 금융, 기술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중국은 1978년에 개혁개방에 착수하고, 북조선도 나아가서는 그걸 착안해 1983-4년부터 합작 회사 허용 등 외자유치에 착수했는데, 미국 주도의 외부적 봉쇄로 실패한 것이죠. 반면, 남한은 미-일로부터의 재정적, 기술적 지원을 계속 받는 상황에서는 초기 산업화 (포철 등 철강생산, 자동차와 선박 생산 시작)부터 고품질 소비재 생산 (1980년대말 이후 가전 대량 수출의 시대)로의 전환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 산업화 성공의 비결은, 북조선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했던 내부 생산자원 (인력 등) 동원도 아니고, 북조선에서도 당연히 가능했던 국가 주도 그 자체도 아니고, 일차적으로 '외부환경'이죠.

한국 민주화의 국제정치비교론

한국처럼 친미반공 군사 독재와 싸웠던 브라질 같은 나라에서는 2003-16년간 사민주의적 성격의 노동자당이 집권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엇비슷한 기간 (2000년 이후)에는 민노당이라는 이름의 엇비슷한 사민주의적 성격의 정당은 집권 대신에 초기 성공들 이후의 고립과 침체, 그리고 그 다음에는 분열과 그 후계세력들의 약체화 등을 겪었습니다. 브라질 같아서는 노조조직률 (15%)도 한국 (9%)보다 높지만, 무엇보다는 노조나 각종 사회운동들의 상대적 급진성 역시 눈에 띕니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노조 활동가들에 대한 대단히 지능적인 탄압부터 시작해서 국가나 기업들의 인구, 노동자에 대한 '관리' 능력은 월등히 더 높습니다. 과거 급진 운동 유경력자들이 - 조국, 이인영, 이종석 등등처럼 - 아주 쉽게 자유주의 세력에게 포섭돼 각종 정당, 정부 등에 스카웃되는 것이고요. 결국, 남미 등과 비교한다면 한국에서는 지배 관벌, 재벌들이 민주화의 급진성을 대단히 잘 '소거'시킨 것입니다.

세계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한국 근현대사 - 민중반란의 역사부터 외부조건에 민감한 관 주도의 개발, 그리고 급진파를 무장해제시키고 체제 속으로 빨아들이는 메카니즘까지 - 는 훨씬 더 체계적으로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국사'가 철폐되어 아이들이 세계 속 한국의 '역사'를 언제부터 배울 수 있을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 이 글은 박노자 교수의 개인 블로그에서 퍼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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