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타 목사의 실족에서 발견하는 희망
한 스타 목사의 실족에서 발견하는 희망
  • 김영봉
  • 승인 2019.08.06 11:1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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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해리스의 고백에 대한 몇 가지 생각
김영봉 목사
김영봉 목사

 

<노 데이팅>(두란노), <겸손한 정통 신앙>(생명의말씀사), <교회, 그냥 다니지 마라>(좋은씨앗) 등의 저서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조슈아 해리스 목사가 최근에 그의 SNS에서 밝힌 양심선언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I Kissed Dating Goodbye>는 1997년에 출판된 이후로 미국에서 100만 부가 넘게 팔리면서 그는 미국 복음주의권에 영향력 있는 인사로 주목받아왔다. 그로 인해 그는 2004년에 매릴랜드에 있는 커버넌트라이프처치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2015년까지 초대형 교회로 부흥시켰다.

2015년에 그는 갑작스럽게 담임목사직에서 사임하고 밴쿠버로 돌아가 신학 공부를 하겠다고 밝힌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라면서 홈스쿨링으로 성장한 그는 정식 신학 교육을 받기도 전에 저서로 유명해졌고, 유명세에 힘입어 정식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메가처치의 담임목사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 예고했던 것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2016년에 그는 자신이 그동안 출간한 책에서 펼쳤던 주장들을 하나씩 철회하면서 그로 인해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사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지난 7월 중순에 그는 자신의 SNS에 아내와의 이혼 사실을 밝힌다. 그의 아내 새논 해리스도 역시 성와 결혼에 대해 몇 권의 책을 출간한 바 있다. 그들은 거룩한 결혼 관계 안에 살고 있는 행복한 부부의 모델처럼 보였기에 그들의 이혼 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SNS에 달린 댓글들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들의 이혼 소식에 충격을 받았는지를 증명한다. 그 소식을 접한 <소저너스>는 7월 19일에 "Questioning Faith after Purity Culture"라는 그와의 인터뷰 기사를 싣는다.

며칠 후, 해리스는 이혼 소식에 대한 팔로워들의 반응에 대해 몇 마디 응답을 쓴다. 그런 다음, 그는 더욱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우리가 알린 소식 중에 아직 밝히지 않은 사실은 제가 예수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해체'(decontruction)라고 하고 성서의 언어로는 '실족'(falling away)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해 제가 가지고 있는 정의에 따르면 저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실천하는 다른 방식도 있다고 제게 말합니다. 저는 그 길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계속하여 자신이 그동안 저서와 설교를 통해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사과의 말을 덧붙인다. "신자의 생애 전체는 회개의 과정이다"라는 마틴 루터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은 회개의 과정을 거쳐왔다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자기의(self-righteousness), 두려움에 기초한 인생관,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대한 견해, 자녀 교육에 대한 입장 등에 대해 회개의 과정을 거쳤다고 밝힌다. 특별히 그는 동성애 문제와 인간의 성에 대해 그동안 자신이 가르쳐온 내용에 대해 성소수자들에게 사과한다고 하면서, "결혼의 동등성에 대해 반대해온 것에 대해, 여러분 자신과 교회 안에서의 여러분의 자리를 인정하지 못한 것에 대해, 그리고 나의 글과 설교가 배제와 혐오의 문화에 어떤 면으로든 공헌했다는 점에 대해 여러분에게 용서를 구합니다"라고 썼다.

해리스의 자기고백 혹은 양심선언은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그가 전직 메가처치의 목사였다는 사실과 보수 진영의 스타 작가였다는 점에서 월스트리트저널이나 CNN 같은 주류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SNS를 통해 퍼져나갔다. 그의 책을 읽었던 사람들은 더욱 그렇고, 그를 알지 못하는 신자들도 기독교 보수의 가치를 옹호하고 전파하던 사람이 신앙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나의 SNS 계정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을 전하면서 당혹스러움을 표현했다.

영혼의 어두운 밤

조슈아 해리스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했던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이다. 영혼의 어두운 밤은 인생 여정에서 겪을 수 있는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분과의 인격적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여정 중에 겪게 되어 있는 영적 침체 혹은 영적 암흑의 기간을 말한다. 물질과 육신의 한계에 갇혀 있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수도-디오니시우가 말한 대로 '알 수 없음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을 더듬는 것과 같은 일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유영모 선생의 말대로 '없이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분을 찾아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현존에 대한 회의와 의심과 불신의 골짜기를 지나게 되어 있다.

21세기의 성녀라 불리는 테레사 수녀의 사적인 편지들이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공개되어 큰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 편지에 의하면, 테레사 수녀는 아주 일찍부터 세상을 떠난 1997년까지 만성적인 회의와 불신을 대항해 내적 싸움을 싸워왔다. 그는 간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위로를 받기도 했지만, 더 많은 시간을 침묵, 암흑, 부재의 구름 아래서 살아갔다. 공교롭게도 그가 이름을 따온 19세기 프랑스 수녀 테레사도 역시 평생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회의에 시달렸다. 그는 동료 수녀들에게 "당신들이 내가 빠져 있던 이 어둠의 깊이를 알 수 있다면!" 하고 탄식하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회의의 감정에 이성적 동의를 허락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감정에 속지 않기를 다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한계를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안다" 혹은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말은 매우 모호하고 믿을 수 없는 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을 쓰던 중에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서 절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의 옷자락을 보고는 더 이상 인간의 경험적 언어와 자신의 한계적인 논리로 그분에 대해 설명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느낄 때가 오히려 헤매고 있을 때이고, 하나님을 느낄 수 없다고 느낄 때가 제자리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그런 고백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교리적인 승인의 대상이 아니라 인격적인 신뢰의 대상으로 알고 그분을 찾고 그분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길든 짧든, 심하든 경미하든, 영적 어둠을 지나게 되어 있다. 그 감정과 싸우는 것은 힘겨운 일이지만, 그 기간을 지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 새로운 지경이 열린다. 문제가 심각하여 그 의문과 회의에 압도되어 모든 믿음을 부정하고 해리스처럼 실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의 하나님 경험이 진실이었다면, 그 광야의 기간을 지나 다시금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믿는다. 

나는 이것이 해리스가 지금 거치고 있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그가 이처럼 깊고 푸른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맞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매우 보수적이고 율법적인 분위기 안에서 자랐고, 너무도 이른 나이에 자신의 세계를 대변하고 변호하는 전사로 나섰다는 데 있다. 그는 매우 보수적인 부모의 홈스쿨링을 통해 성장했고, 불과 21세에 <노 데이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으며, 30세에 메가처치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 이전에 제대로 된 정식 신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어릴 때부터 주입된 교리와 신앙 방식 안에 살면서 자신의 세계를 전파하고 변호했던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서 눈 질끈 감고 교리 수호자로 살아갈 수도 있지만, 해리스는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소저너스>에 실린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목회 기간 중에 자신이 전파하고 변호했던 진실에 대해 의문과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인해 목회의 자리도 떠나고 믿음까지 떠난 것이다.

나는 그가 자신의 믿음에 정직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자신의 양심선언으로 인해 그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을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베스트셀러로 팔리던 모든 저서들을 판금시키고 절판시키겠다고 했다. 금전적인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는 추앙받고 존경받던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내려놓았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인기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위선을 택한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믿음으로부터 돌이킬 기회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해리스처럼 정직한 사람은 그 정직성 때문에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다. 그가 SNS에 남긴 글 중에 "사람들은 믿음을 실천하는 다른 방식도 있다고 제게 말합니다. 저는 그 길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의 짐작이 단순한 바람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다. 과거에 믿던 하나님을 떠났을 뿐이다. 하나님을 찾는 과거의 방식을 버린 것뿐이다. 그가 새로운 길로 들어서기까지 공백기는 필요하다. 그 공백기를 지나면 그는 전에 가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통해 하나님께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그것이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영적 행보였다.

위험한 소명

해리스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내게 든 또 다른 생각은 목회직의 위험성이다. 폴 트립은 목회직에의 소명을 '위험한 소명'(a dangerous calling)이라고 불렀다. 목회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이지만, 그곳은 또한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자리다. 나는 목회의 자리에서 이 사실을 거듭거듭 경험하고 있다.

목회직이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자리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익숙함의 함정'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거듭 접하다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당연하게 느끼게 된다. 유대 종교 사상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모든 것은 그 빛을 잃고 그 의미를 잃는다.

목회직은 늘 새롭게 대해야 할 것들을 익숙해지게 만들고 당연히 여기게 만든다. 처음에는 선포할 때마다 가슴을 뛰게 했던 복음이었다. 하지만 거듭 전하면서 익숙해지고 당연해진다. 그로 인해 진리에 대한 설레임과 열정은 식고 그 진리에 대한 확신도 껍데기처럼 굳어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결국 바울 사도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먹고 사는 장사꾼"(고후 2:17)이 되어버린다.

그뿐 아니라, 목회직은 늘 두렵고 떨림으로 대해야 할 대상들을 당연하게 여기게 만든다. 예배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안다면 그 자리에 설 때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대해야 한다.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소명인지를 안다면 두렵고 떨림으로 최선의 준비를 하고 최선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야 한다. 그 자리에서 허튼 말을 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성례를 행하고 세례를 베풀고 성도들을 찾아 만나는 모든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망각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을 형식으로 대하게 된다. 익숙함이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목사는 스스로 연극을 하고 있다는 회의감에 사로잡힌다.

목회직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일이다.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목회자는 늘 을의 입장에 서게 되어 있다. 권위주의적 경향이 강한 한국 교회에서는 목사가 갑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교회 문화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증명한다. 교회에서 목사는 을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 교인들의 영혼을 진실하게 위하는 목회자라면 기꺼이 을의 위치에 선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vulnerability'를 꼽는다. 이 단어에 해당하는 우리말 번역어가 마땅치 않다. 나는 '을의 위치에 서는 것'이라고 번역한다. 자신을 낮추어 교인들의 필요를 위해 섬기는 자세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이런 위치에 서는 것은 꽤 높은 강도의 소모와 탈진을 불러온다. 그것은 거부, 비판, 모욕, 오해, 배척 같은 부정적인 반응을 견딘다는 뜻이다. 이런 부정적인 경험을 감당하고 소화할 만한 영적 내공이 부족하면 목회자는 쉽게 탈진하고 소모된다. 그 감정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불러오며, 그 감정은 하나님께 대한 실망과 회의로 이어진다. 이런 과정에서 패잔병이 되어 목회의 자리를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고, 해리스처럼 하나님께 대한 믿음까지 접어둔 사람들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목회직의 또 다른 위험성은 한 공동체의 최종 책임자로서의 정신적 부담에 있다. 교회가 크든 작든 목회자는 한 공동체의 최종 책임을 어깨에 걸머진다. 한 공동체의 운명이 자신의 어깨에 지워졌다는 사실은 때로 큰 부담이다. 또한 그 공동체에 일어나는 변화 혹은 변화 없음에 대한 책임도 결국 목회자에게 돌아온다. 그 결과로 인해 평가받기도 하고 비난받기도 한다. 거기에서 오는 마음의 짐을 잘 다루지 못하면 그 짐에 짓눌리게 되고 그 피해는 영혼 깊은 곳에까지 미친다.

현대 과학을 통해 잘 알려져 있듯, 인간의 몸과 혼과 영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유기적 하나다. 그렇기에 몸에 일어난 변화가 정신과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고, 영혼에 일어난 변화가 몸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목회의 자리에서 겪게 되는 성소에 대한 익숙함, 인간에 대한 환멸 그리고 과도한 정신적 부담은 영적인 탈진을 불러 오고, 영적인 탈진은 하나님께 대한 회의와 불신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해리스가 이런 일을 겪었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실족 이야기를 들으면서 목회직의 위험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더듬어 찾아가는 영적 여정

내가 아는 기독교 신앙은 어떤 교리 체계를 습득한 후에 그것을 지키는 노력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린 영적 여정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분과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한계적인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에 계시며 또한 우리로서는 그분의 옷자락도 감당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분은 우리에게 '없는 것처럼 계신 분'이며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를 분'이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을 이렇게 정의했다.

"하나님은 최고 본질,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최고 신성, 최고 위대, 최고 미, 최고 불사성, 최고 불변성, 최고 복락, 최고 영원성, 최고 권능, 최고 일자성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초월성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오해했다"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다. 우리는 다 알 수 없는 그 하나님을 향해 부단히 나아간다. 어제 알았던 하나님 상을 우상으로 내려놓고 우리 앞에 새롭게 당신을 드러내 주시기를 바라면서 '알 수 없음의 구름'을 더듬어 찾아 나아가는 것이다. 그 여정에서 때로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를 경험하고 의문과 회의와 불신의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것이 전혀 없다면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붙들고 사는 것이리라.

목회직은 이러한 영적 여정의 도상에 있는 공동체를 섬기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혹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일에는 매우 어려운 도전과 위험과 부담이 수반된다. 목회자 자신이 정직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고 신실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회자는 영적 사기꾼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패잔병이 되어 목회의 자리를 떠나거나 심하면 믿음의 자리도 떠난다. 그런 사람의 경우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지만, 애시당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

목회자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믿기 때문에 목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러면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목회자의 우선적이고 일차적인 과제는 방어와 변호가 아니라 스스로의 믿음을 위한 질문과 탐구에 있다는 뜻이다. 직업적 필요성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에 믿을 때까지 묻고 물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믿음에 대해 정직하고 진실할 때 그는 실족의 함정과 익숙함의 함정을 피하여 영적 여정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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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므 ㅣㄸㄸ 2019-08-07 05:32:22
장효희 목사 이야긴줄 알았슴둥 ....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6630

자전거 2019-08-13 22:44:58
정말 귀하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에서 목회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 애정을 느낍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고 큰 격려를 받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