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남성성
전쟁과 남성성
  • 권건우
  • 승인 2022.03.0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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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건우 목사 칼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통해 본 남성성의 폭력과 평화의 길
권건우 목사
권건우 목사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로 인해 연일 세계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 불타며 연기를 뿜는 차량들과 폐허가 된 건물들, 그리고 자의 혹은 타의로 ‘전쟁-기계’가 된 군인들을 보고 있으니 21 세기에 이게 무슨 야만인가 싶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기후 위기가 더욱 심화될 수록 식량과 자원을 둘러싼 국가 간 분쟁과 갈등도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1999년부터 장기 집권한 독재자 블라디미르 푸틴이 구소련의 부활을 꿈꾸며 핵 카드까지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세계는 급속도로 신냉전의 공포에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엑스포가 한창일 때 어린 제가 꿈꾸고 상상했었던, 과학기술이 인간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눈부신 미래는 기실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번 사태를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는 뉴스 기사와 사설들이 쏟아져나왔지만, 한 가지 제 눈에 띄는 것은 젤렌스키 리더십입니다.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국민의 종>이라는 시트콤에서 대통령을 연기했던 희극인으로서, 대중들의 지지를 받아 실제로 대통령이 된 이후 국정운영에 대한 비판을 받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번 사태를 맞이해서 보여준 단호함과 진정성, 솔선수범과 희생의 리더십은 우크라이나인들과 세계 시민들의 지지와 환호를 끌어내어 “젤렌스키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이 제공한 도피 계획을 거부하고 “내게 필요한 건 탈출이 아니라 탄약”이라고 못 박았다지요.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수도 키예프를 떠나지 않고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 한국인들은 한국전쟁 당시 한강 철교를 폭파시켜 민중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신들만 도피했던 이승만 정권 당시의 지배 계층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한편으로 제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있습니다. 바로 전쟁이라는 상황이 불가피하게 불러내고 있는 “강한 남성성”(hyper-masculinity)에 대한 향수와 기대입니다.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가 젠더 정의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 내몰리는 것은 언제나 여성과 어린이, 노약자 등의 취약한 이들입니다. 반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전쟁을 통해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남성 지배계층이었습니다. 예컨대 <일리아드>에서 전사 아킬레우스는 단지 명예(honor)를 위해, 즉 영원히 이름을 남기기 위해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지요. 원래 고정된 남성성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페미니즘 연구자이자 평화 교육가인 베티 리어든(Betty Reardon)이 주장하듯, 전쟁이 남성성을 만듭니다.1 그런 면에서 전쟁은 본질적으로 성차별적입니다. 보호하는 남성과 보호받는 여성을 분할하는 군사주의는 후자를 2등 시민으로 격하시킵니다. 많은 한국 남성들의 남성성은 군대 경험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캡틴 우크라이나와 푸틴
캡틴 우크라이나와 푸틴

그렇기에, 젤렌스키의 얼굴을 캡틴 아메리카에 합성하여 “캡틴 우크라이나”라고 명명하는 이미지를 보며 저는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민주 공화국을 위한 그의 헌신적 면모가 인정할 만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든든한 보호자(guardian)로서의 남성 지도자에 대한 강박이야말로 작금의 사태를 일으킨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의 배후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오빠가 지켜줄게” 서사를 따라야 할까요? 왜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출직 대표자인 대통령을 뽑으면서도 이순신과 세종대왕을 합쳐놓은 ‘선한 (그러나 강한) 임금님’을 기대할까요? 여야를 막론하고 대통령 후보들이 선거철만 되면 군복을 입고 나타나 안보 지도자를 자처할 때마다, 저는 이것이 남성중심적이면서 동시에 지독하게 반민주주의적이라고 느낍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 침공을 지시한 러시아의 푸틴이야말로 호전적인 남성성을 자신의 주된 이미지로 내세워서 현재까지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정치 지도자입니다. 그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남성성 과시는 인터넷에서 여러 종류의—전투기를 조종하면서 깜짝 등장한다든지, 웃통을 벗고 곰을 탄다든지 하는—과장된 밈(meme)을 통해서, 또한 그의 KGB 시절의 여러 부풀려진 모험담을 통해 유포되고 소비되어 왔습니다. 우리 민족과 국가 공동체를 승리와 번영으로 이끌어 줄 강력한 남성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열망은 오늘날 전세계에서 득세하고 있는 우파 포퓰리즘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를 고려해 본다면, (젤렌스키 본인의 헌신적인 노력과는 별개로) 젤렌스키의 영웅적 남성성이 현재 칭송받고 소비되는 방식은 그리 건강하지 못하다고 저는 느낍니다.

그런 면에서, 저의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장면은 전투에서 붙잡힌 러시아 군인들입니다. 강제 징집되어 원하지도 않는 전쟁터에 끌려와 살상을 요구받다가 포로가 된 열아홉 살의 앳된 청년들은 “군사훈련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로 올 줄은 몰랐다”고 말합니다. 딱하게 여긴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전화를 빌려주자 어머니와 통화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여기에 영웅적이고 강인한 남자다움(manliness)의 자리는 없습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취약한(vulnerable), 돌봄을 필요로 하는 한 인간이 있을 뿐입니다. 국가에 의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어 동원된 이들도 결국 평범하고 연약한 인간들입니다. 이러한 취약성을 거부하는 남성성(invulnerable masculinity)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지적한 것처럼 종종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 가장 치열했던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난 후 현장에서 2만 7574정의 소총이 회수되었는데, 그중에서 2만 4천여 정은 장전이 된 상태였다고 합니다.2 말인즉슨, 화약과 총탄을 넣은 채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병사는 적을 죽이고자 하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누군가를 살해한다는 것이 그만큼 우리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전쟁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주춤하거나 머뭇거리는 병사들을 보면 “저 답답하고 찌질한 겁쟁이 새끼!”라고 소리칠지도 모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 1998)의 ‘업햄 상병’이라는 캐릭터는 바로 그러한 이유로 많은 욕을 먹은 (그리고 지금도 먹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겁쟁이들이 세상을 덜 폭력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빗발치는 총탄과 사방에서 터지는 포탄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남성은 신화이고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그로 인해 득을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남성성의 신화/이데올로기를 장려해서 득을 보는 것이 누구일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겠지요.

우크라이나군에게 생포된 러시아군 (우크라이나 국방부)
우크라이나군에게 생포된 러시아군 (우크라이나 국방부)

더 나아가, 우리는 용기를 호전성과 분리해 ‘폭력을 거부하는 용기’로 다시 개념화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많은 철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주장해 왔듯, 폭력과 비폭력을 정의하고 구분 짓기란 사실 매우 까다롭습니다. 비폭력 시위도 ‘폭력적’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반면, 구조적 폭력의 폭력성은 가시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강자가 휘두르는 폭력과 약자의 저항 폭력 혹은 자기방어를 동일선상에서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때로 어떤 폭력의 사용은 정당화될 수 있다(justifiable)는 것이 정전론 전통(just war tradition)의 오랜 주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버틀러 등이 말하는,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힘은 비폭력의 힘입니다. 버틀러의 말을 빌리면 “비폭력적 공격성” (nonviolent aggression) 또는 “전투적 평화주의”(militant pacifism)입니다.3 세계의 비참과 부정의에 분노하고 이에 저항하는 비폭력 직접행동(nonviolent direct action)은 현실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이나 타협과 다릅니다. 동시에, 이는 취약성을 거부하고 극복하면서 남성적인 주권(sovereignty)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취약성이라는 인간의 조건 자체를 저항의 근원으로 놓는 행위입니다. 폭력을 ‘겪음’으로써 이에 저항하는, 능동태와 수동태 사이로 난 좁은 길입니다.

사순절을 앞둔 지금, 개선장군의 말이 아닌 초라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나무에 무력하게 달려 국가 폭력의 희생자가 되신 그분을 다시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1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53248.html

2 Dave Grossman, On Killing: The Psychological Cost of Learning to Kill in War and Society (Back Bay Books, 2009) 

권건우 목사는 현재 시카고 로욜라 대학 (Loyola University Chicago) 박사과정에서 정치신학과 윤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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