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왜 생명의 문제가 아니란 말인가?", 기후 붕괴 시대의 생명
"이것은 왜 생명의 문제가 아니란 말인가?", 기후 붕괴 시대의 생명
  • 권건우
  • 승인 2022.06.18 06: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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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과 환경 문제에 대한 권건우 목사 칼럼

생명의 신성함

권건우 목사
권건우 목사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보장한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기각하기로 한 결정이 유출되어 큰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미국에는 ‘프로 초이스’(pro choice)와 ‘프로 라이프’(pro life)라는 것이 있지요. ‘프로 초이스’는 여성이 임신 중지를 선택할 권리(재생산 권리)를 옹호하고, ‘프로 라이프’는 태아 생명의 신성함을 옹호하여 낙태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지요. 저는 우리 삶의 복잡성과 모호함을 고려해 볼 때, 대부분의 윤리적 문제들은 흑백논리나 추상적인 원칙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특수한 삶의 정황과 경험, 서사들에 주목해서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는 편입니다. 또한, 낙태를 범죄화하는 것은 여성의 도덕적 자율성에 대한침해이며,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당사자인 여성들의 목소리는 반드시 주목하고 경청해야 할 도덕적 원천(a moral source)입니다. 몇 년 전 한국의 행정자치부가 제작한 ‘가임기 여성 지도’처럼 여성을 ‘아이 낳는 기계’ 정도로 보지 않고 동등한 주체이자 시민으로 본다면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모든 생명은 근본적으로 신성하다고(sacred) 믿습니다. 즉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기원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gift)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을 따라, 모든인간은 ‘하나님의 형상’(the imago Dei)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한 존재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저도 ‘프로 라이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에서 ‘프로 라이프’ 입장을 지지하는 많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낙태 문제에 대해서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치지만,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생명을 죽이는 다른 일에 대해서는 전혀 무심할뿐더러, 때로는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미국에선 2020년 한 해 총기에 의한 사망자 수가 무려 2만 명이었다고 이들 중 상당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해 전에는 워싱턴 D.C.에서 청소년들이 제발 총기를 규제해 달라고 어른들에게 호소하면서 “우리의 생명을 위한 행진”(March for Our Lives)이라는 시위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샌디 훅 참사 이후 최대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 텍사스 유 밸 데에서 발생해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곧 킨더에 입학한다고 기뻐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제 마음은 매우 착잡합니다.) 비록, 며칠 전에 민주당과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총기 규제를 위한 타협안을 도출해냈지만, 여전히 이는 미흡한 수준입니다. 수정헌법 2조가 보장하는 총기 소유권을 신성시하는 미국이란 나라에서 강력한 총기 규제는 요원할뿐더러, 결코 ‘프로 라이프’ 문제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더욱 가시화되었지만, 건강보험이 민영화된 미국에서 제대로 된 보험이 없어서 제때 치료받지 못해 고통받고 죽어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것은 ‘프로 라이프’ 이슈가 아닌 걸까요? 이 밖에도 목록은 훨씬 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오랜 빈부 격차와 불평등의 문제, 유색인종에 대한 경찰 폭력(police brutality)과 대량 수감(mass incarceration)의 문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 대한 착취와 차별과 억압, 이민자와 난민 및 성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 성폭력과 성적 착취, 그리고 환경 파괴와 오염의 문제까지. 이 중 어느 하나 ‘생명’에 대한 문제가 아닌 것이 있을까요? 왜, 우리는 이런 이슈들을 ‘프로 라이프’ 문제라고 부르지 않을까요? 예컨대, ‘흑인의 생명이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은 왜 프로 라이프 운동이 아닌가요?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그렇게 중히 여긴다면서 이렇게 생명을 죽이고 상하게 하는 세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수용하거나 심지어 긍정하는 것일까요? 제겐 오랜 수수께끼입니다.

환경 부정의와 기후 불평등

기왕 환경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최근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화학 독성물질 오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보다 많다고 합니다. 매년 최소 900만 명이 살충제, 플라스틱, 전자폐기물에 의한 오염으로 조기 사망한다는 것입니다.1 또 다른 기사를 읽어 보니, 전 세계의 사망자 다섯 명 중 한 명은 화석연료에서 나오는 미세먼지 때문에 사망한다고 하더군요.2 한국에서도 화석연료 미세먼지로 인한 사망률이 30.5 퍼센트로 세계에서 4위라고 합니다. 수도권에선 연간 4천 내지 5천 명이 사망한다고 하니,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파괴한 자연이 다시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 팬데믹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제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생태 문제와 건강 문제는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인간도 생태계 안에서 그 일부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노먼 위어즈바(Norman Wirzba)의 말처럼, 우리가 대지를 사랑하고존중하면, 대지도 우리에게 그 사랑과 존중을 돌려줍니다. 그리고 그 역도 참이겠지요.

물론 이러한 환경오염으로 인한 죽음의 문제가 모든 이들에게 ‘차별 없이 평등하게’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말했듯이, 우리 인간은 모두 취약하지만(precariousness) 어떤 이들은 정치적, 구조적으로 더 취약한 처지로 내몰립니다 (precarity). 환경 부정의(environmental injustice), 그리고 환경 인종주의(environmental racism)라는 용어들이 암시하듯, 환경 파괴로 인한 인간 건강과 생명의 손상은 기존에 존재하던 불평등과 억압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미시간주 플린트의 식수원 오염 사태, 루이지애나주의 “암 골목”(cancer alley), 그리고 석유 파이프라인을 둘러싸고 아메리카 토착민 수 부족(Sioux Tribe)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노스다코다 주의 스탠딩 락은 대표적인 환경 부정의와 환경 인종주의의 사례입니다. 가난한 저임금 계층, 흑인, 아메리카 원주민 등이 주로 독성물질과 오염에 의해 피해를 보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평택 대추리, 밀양 송전탑, 제주 강정마을, 그리고 수많은 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선 농어촌 지역들은 환경 파괴로 인해 부서진 삶과 공동체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찾아오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누리는 깨끗하고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은 어떤 장소와 지역을 ‘희생 지대’(sacrifice zone)로 만든 대가로 얻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흑인 신학자 제임스 콘(James Cone)은 <어쨌거나 누구의 지구인가?>(Whose Earth Is It Anyway?) 라는 짧지만 유명한 아티클에서, 인종 문제에는 무관심하면서 생태계 보전에만 관심하는 백인 환경 보호론자들과 생태신학자들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습니다. 존 뮤어(John Muir)와 같은 대표적인 (백인 남성) 환경 보호론자들이 인종주의와 에코파시즘(eco-fascism) 성향을 지녔음을 기억한다면, 정말 귀담아들어야 할 비판입니다.3 그러나 동시에, 콘은 결코 생태 문제에 둔감했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생태 정의와 사회 정의가 분리될 수 없음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태학은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을 다룬다. 이는 단지 엘리트주의 혹은 백인 중산층 이슈가 아니다.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은 가난한 흑인들과 다른 주변부 그룹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인권 및 시민권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종주의 문제로부터 주의가 분산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태적 위기의 긴급성을 못 보도록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인종주의가 없는 환경을 향유하지 못한다면, 인종주의를 제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4

인류가 지금 겪고 있는 사상 초유의 기후 위기 역시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영향을 주지 않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후정의 운동가들, 그리고 심지어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나서서 북반구 국가들이 남반구 국가들에게 지고 있는 “기후 부채”(climate debt)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5 인도의 작가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는 기후 위기와 식민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하고, 루터교 신학자 신시아 모-로비다(Cynthia Moe-Lobeda)는 이를 아예 “기후 식민주의”(climate colonialism)로 명명합니다.6 기후 난민(climate refugee)은 거의 대부분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등 남반구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 기후 위기를 야기한 탄소 배출에 대해 거의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7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을 낳는 폭력적이고 약탈적인 근대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는 오늘날 기후 붕괴라는 전 지구적 장기 비상사태에서도 반복/심화되고 있습니다. 최근 칼럼에서 대기과학자 조천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일한 행성인 지구를 공유한다. 하지만 인류는 더 많이 생산하는 데는 천재적 재능을 보여왔으나, 더 많이 나누는 데는 무능의 극치를 드러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지구에서 불평등은 소수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우리 모두의 장기적 이익을 파괴한다. 그로 인하여 온실가스 농도는 이 세상 모든 곳에서 평등하게 증가해도, 그 피해 대부분은 불평등하게 가난한 곳과 다음 세대에서 일어난다. 곧 기후 위기는 ‘가진 자’들이 일으킨 위험이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일어나는 것이다.”8

자본주의라는 반생명적 체계

앞서 말씀드린 ‘생명’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자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겪고 있는 생태적 위기의 뿌리에는 반(反)생명적인 자본주의 체계와 삶의 방식이 놓여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인류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인간과 자연을 끊임없이 상품화하는 “악마의 맷돌”로서의 자본주의 정치경제에 맞서 호혜와 연대, 재분배에 기초한 ‘살림살이의 경제’를 옹호했습니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를 낳는 GDP 중심의 성장 패러다임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채굴경제는 맑스가 말한 것처럼 자연의 “신진대사(metabolism)”에 균열을 냈습니다. 유한한 행성에서 무한한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계로 인해 지구 시스템은 급속도로 망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이는 고스란히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 클라인은 자본주의가 “지구와 전쟁을 벌이는 시스템”이라고 썼습니다.

해양 생태계는 교란되고 파괴되어 가고 있으며, 가뭄과 산불, 폭염과 홍수는 이제 연례행사처럼 우리를 찾아옵니다. 서식지 오염과 파괴로 인한 급속한 멸종과 생물다양성 감소는 생태계 전반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후 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서서히, 그러나 빨리 잠기고 있는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아이들에겐 미래가, 그리고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근대 생명 정치는 한편으로 어떤 생명은 상품화하며 관리하고, 다른 한편으로 어떤 생명은 위험에 노출되어 죽음에 처하도록 내버려 둡니다.9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최근 말한 것처럼, 기후 재난에 대처할 자원을 가진 부유한 이들과 그렇지 못해 취약한 이들은 서로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10 그러나, 언젠가는 모두에게 찾아올 문제입니다.

2018 년 <1.5 도 특별보고서>는 2052년이면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시기보다 섭씨 1.5 도 상승하는 시점에 도달한다고 보았지만, 최근 IPCC 6차 평가보고서는 이를 2040년으로 전망합니다. 섭씨 1.5 도라는 티핑 포인트를 넘는다고 지구 시스템에 종말이 오는 것은 아니겠으나, 소위 ‘되먹임’ 현상으로 인해 인간의 활동 여부와 관계없이 지구 스스로가 가열을 진행함으로써 기후 붕괴가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더운 날씨를 피해서 시원한 곳에 별장을 구입하고 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안전한 장소는 없습니다.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꿈꾸는 우주 개발과 다행성 식민지는 허상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에서 노래하듯,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작금의 기후 위기를 생명의 문제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장과 개발을 ‘진보’의 척도로 여기며 파국을 향해 전진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비상 브레이크를 걸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찬미 받으소서>에서 요청한 “생태적 회심(ecological conversion)”은 개인의 삶뿐 아니라 공동체적, 구조적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즉, 개인적으로 삶의 방식을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구조적으로 체제 전환을 요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 기후운동가들의 모토처럼, “기후가 아니라 시스템을 바꾸자(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고 외쳐야 합니다. 죽임이 아니라 살림의 시스템으로 말입니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 새는 / 천국을 온통 분노케 하며 /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고 블레이크는 썼습니다. 우리는 이 행성에, 그리고 서로서로에게 무슨짓을 해 온 것일까요? 영화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 2017)에서 어느 환경운동가가 교구 목사에게 던졌던 절망스러운 질문을 다시 떠올립니다. “신은 우리가 이 세계에 저지른 일에 대해 우리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은총을 구할 뿐입니다.

* 권건우 목사는 현재 시카고 로욜라 대학 (Loyola University Chicago) 박사과정에서 정치신학과 윤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1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128916?sid=104 

2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982499.html

3 https://www.newyorker.com/news/news-desk/environmentalisms-racist-history 

4 James Cone, “Whose Earth Is It Anyway?”, 41-42.

5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참고하십시오. http://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214561

6 Amitav Ghosh, The Great Derangement: Climate Change and the Unthinkab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7); Cynthia Moe-Lobeda, “Climate Change as Race Debt, Class Debt, and Climate Colonialism: Moral Conundrums, Vision, and Agency,” in Ecological Solidarities: Mobilizing Faith and Justice for an Entangled World, 61-80 (Penn State University Press, 2020).

7 그런 까닭에 제이슨 무어(Jason Moore)나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 등의 학자들은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기의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가 아닌 자본세(capitalocene)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8 https://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1031762.html?_fr=mt0

9 https://criticallegalthinking.com/2020/03/02/achille-mbembe-necropolitics/ 

10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21/dec/24/pandemic-earth-lockdowns-climate-crisisenviro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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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gini 2022-12-14 18:15:47
정말 긴급하고 중요하지만 다들 모른체 시치미를 떼고 있는 이야기...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