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가 탄생한 곳이 바로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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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대
  • 승인 2022.09.13 0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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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순례(2) 질스마리아에 남아 있는 니체의 체취

토리노에서천대(?)’받는 니체가 아쉬워 그의 진정한 안식처였던 질스마리아를 찾기로 했다. 마침 기차가 있어 스위스 취리히로 향했다. 취리히 앞의 분위기는 아주 오래 전의 기억에서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질스마리아는 니체가 요양차 갔던 스위스 북부의 산세가 좋고 아름다운 호수를 가진 휴양도시다. 니체의 연보(年報)로는 질스마리아에 있다가 토리노로 갔지만 나는 반대의 여정을 따른다. 어떤가? 영원은 회귀하고 지금은 영원과 이어지는데 그깟 순서쯤이야!

니체 바위에서 바라 본 질스 플라나 호수
해발 1800미터 지점에 있는 질스 플라나 호수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가는 문제였다. 산세가 험해서 직행 기차나 버스가 없고 기차 버스 교대로 최소한 이상 갈아타는데다가 차비도 왕복 300유로 이상 든다. 옛날 니체는 마차로 산을 넘었을 텐데 건강도 안좋은 사람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내가 무슨 대단한 니체 연구가라고 짓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번 여행의 1 목표였던 몽블랑 둘레길 트레킹을 걸어서 완주 못한게 내심 마음에 걸렸다. 2 목표가 니체 트립이었는데 이것 마저 흔적도 없던 토리노에서 마쳐 버린다면 이번 여행에는 건질 것이 없게 된다.

경비를 감안하면 렌터카나 대중 교통 차비나 비슷비슷하다. 인터넷으로 가장 렌터카를 예약한 다음날, 창구에서 같은 가격에 차를 업그레이드 주겠단다. 이런 횡재가! 난생 처음 독일제 고급차를 몰아본다. 운전석 유리창에 실시간 속도와 규정 속도, 각종 교통 정보가 뜬다. 요즘 이런 많다지만 차만 타던 사람에게는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여행 날아온 청구서에는 엄청난 비용이 추가되어 있다. 계속 클레임 메일을 보내고 있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이상은 창피해서 못하겠다.

길에 익숙한 운전자들이 뒤에서 빨리 가라고 압박하는 견뎌내며 구비구비 길을 4시간 운전해 도착한 질스 마리아는 상상 속의 곳이 아니었다.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불편한 교통을 무릅쓰고 니체를 보러? 이들은 제네바나 취리히에서 여행사를 통해 관광버스로 사람들이다. 스위스의 험한 산길에 익숙한 사람들은 취리히에서 2시간 반이면 있는 거리라 승용차로 사람들도 많다. 니체 때문에 것이 아니라 풍광을 즐기러 사람들이다. 드넓은 호수의 주차장에는 각종 수상 스포츠 장비를 실은 차들로 빼곡하다.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한 '질스마리아의 구름들'이라는 영화도 있다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한 '질스마리아의 구름들'이라는 영화도 있다

 

요즘 해외 여행에서는 보기드문 서구인들의 시선도 느낀다. 그들에게 관광명소에서 마주치는 동양인은 익숙하지만 이런 곳에서 만나는 초로의 키작은 동양인은 여전히 낯설고 불편한 존재다. 그들은 아직 개명이 됐다.

니체는 이곳을 1881 처음으로 방문해영원회귀 사상 구상한다. 초인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상징하는 인물이나 질스마리아는 차라투스트라가 탄생한 곳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는 이탈리아에서 썼지만 2부와 4부는 질스 마리아에서 완성했으니 말이다.

질스마리아에서 4부를 끝내고 니체는 이렇게 썼다.

 

선과 악의 세계는 피상적인 구분일 뿐이고 보는 관점에 따라 정해진다는 나의 이론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내게 충격을 새로운 발견이다.

 

1888년에 니체는 질스 마리아에서 마지막 여름을 보냈고 토리노로 갔다가 거기서 그의공생애 끝난다. 질스마리아에서 그는 이미 피폐해지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실존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정말 아무도 없다.

 

이런 피폐해진 중에도 그는 생애 마지막 작업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쏟는다. ‘힘에의 의지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 완성한다.

니체는 질스마리아에서 힘, 영초인 등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심연호텔의 철학자들에서 캐그는 그곳의 산세를 보며 그런 개념들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니체 바위, 인터넷 정보에 따르면 글씨를 적은 판이 여러 번 바뀐 것 같다. 이 사진은 2022년 8월 가장 최근의 사진이다. 바위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여기서 어떻게 피라미드를 연상했는지 의아하다.
니체 바위, 인터넷 정보에 따르면 글씨를 적은 판이 여러 번 바뀐 것 같다. 이 사진은 필자가 직접 찍은 2022년 8월 가장 최근의 사진이다. 바위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여기서 어떻게 피라미드를 연상했는지 의아하다.

 

1881 8 그러니까 니체가 처음 질스 마리아를 방문하던 그는 질스 플라나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바위 하나를 발견하고 이렇게 쓴다.

수를레이 근처, 피라미드처럼 거대하게 솟은 바윗덩이 옆에서 멈추었다. 그때 사상이 내게로 왔다.

유명한 니체 바위의 탄생이다. 그런데 니체 하우스에서 바위까지는 짧지 않은 거리다. 니체는 거리를 매일 산책하며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영원을 봤다. 피라미드 처럼 생긴 바위를 보면서 거대한 이집트 문화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 이외의 지역에 있는 가장 이집트 박물관을 방문하러 토리노를 방문했는지도 모른다.

니체 하우스
니체 하우스

 

그가 묵던 집은 니체 재단에서 구입해 니체 하우스로 명명하고 오후 3시나 되어야 개방해서 6시면 문을 닫는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일게다. 낮시간에는 산세와 수상 스포츠, 또는 등산을 즐기고 저녁 시간이 되면 니체 하우스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혹시나 둘러 볼까 하는 마음에서 정한 개관시간일 것이다. 니체의 편지들, 데스마스크, 침실이 보존되어 있다.

 

니체의 침실
니체의 침실

 

니체 이후 많은 철학자 예술가들이 질스 마리아를 찾았다.그들은 니체 하우스에서 멀지 않은 발트 호텔에 머물렀다.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도 발트 호텔을 즐겨 찾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우리 세대는 청소년시절 일본에서 축약한 다이제스트본 데미안 원본으로 알고 읽었다. 그래서 성장 소설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데미안'은 니체를 숭모했던 헤세의 철학서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다시 한번 아니 처음 읽었던 것은 축약본이었으니 새로 읽어 봐야 겠다.

아우슈비츠 이후 이상 서정시를 쓰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라고 말한 비판철학자이자 미학의 대가인 아도르노가 발트 호텔에 묵은 날짜는 420일이란다. 번에 20일씩 묵어도 20 이상 왔다는 말이다.

1931 아도르노의 교수 자격 논문 지도 교수가 신학자 틸리히였다. 독일의 지적 풍토에서 신학이 인문학을 지도할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이런 신학작업을 해오면서 역부족이어서 안타까웠는데 틸리히를 보고 힘을 얻는다. 신학작업은 이런 것인데 우리는 너무 종교간의 대화에만 치중하는 것은 아닌지, 물론 척박한 환경에서 이런 담론을 이끌어 나가는 수고들을 존경하지만 종교라는 우리만의 리그에서 노는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스콜라적인가?

캐그에 따르면 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한 아도르노는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가 멈춘 자리를 출발점으로 삼아 자신의 이론을 구성했다.” 니체와 아도르노 사이에 틸리히가 있는 묘한 구조다. 그렇다면 틸리히의 저서 존재에의 용기 혹시 니체의 힘에의 의지 영향인가?

신은 죽었다라는 한마디 때문에 교회는 니체를 그동안 너무 홀대해 왔다. 무신론자, 정신병으로 죽은 사람 등으로 설교단에서 그를 그만 저주하자. 신학이 그리고 교회가 그를 만나야 신학이 업그레이드 된다. 세상의 모든 학문이 니체를 벗 못삼아서 안달인데 신학만 왜 뒷걸음질 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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