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
  • 최태선
  • 승인 2022.10.15 0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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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갑자기 전광훈이 생각난다. 허약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전광훈을 추종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폭력배들이다. 오죽하면 철거용역들에게 화염방사기까지 만들어 대항할까. 그런 그들은 분명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단언하지만 폭력적인 그리스도인은 없다. 나는 그들도 유심히 관찰한다. 사랑제일교회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기자가 그 사람들을 인터뷰한 내용 가운데 기억나는 한 사람이 있다. 왜 그렇게 멀리서도 그 교회를 나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광훈 목사님처럼 애국운동을 하시는 목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보라. 애국운동이 복음과 관련이 있는가. 사실 이 질문은 심각한 질문이다. 온누리교회와 같은 대형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사랑제일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애국을 신앙의 초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온누리교회는 새해 첫 주인 신년주일에 태극기를 단 위에 놓고 애국가를 4절까지 제창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그들이 정당한 전쟁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정당한 전쟁이란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구약의 성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만군의 주'라고 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인간들에게 전쟁이란 없다. 전쟁은 사람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다.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을 폭력적이라고 주장하고 자신의 백성만을 보호하는 부족신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림자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전쟁이 하나님의 몫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의 도구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다.

믿지 못하겠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생각해보라.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폭력이며 악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전쟁의 결과를 상징할 수도 있다. 십자가는 실패를 의미하며, 모든 폭력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십자가 사건도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선의 도구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군의 주가 되실 수 있고 전쟁으로 인한 모든 악 역시 선의 도구로 만드실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전쟁과 폭력을 근본적으로 금하시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은 폭력을 단념해야 한다.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복음의 요구이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도,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는 이유도, 모든 사회적 장벽을 철폐해야 하는 이유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폭력을 단념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애국과 복음은 상충된다. 국가는 합법적으로 폭력을 용인한다. 국가에 필수적인 공권력 역시 폭력이다. 전쟁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국민들의 생명을 요구하는 국가는 우상이 된다. 우리 시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우상이 바로 국가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인식해야 한다. 애국운동을 운운하고 신년주일에 애국가를 부르는 일의 본질은 우상숭배이다.

콘스탄티누스(좌)와 전광훈(우)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교 안에서 국가를 예외로 인정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그 기원을 '신앙의 자유'에서 찾을 수 있다. 신앙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국가와 복음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폭력을 단념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삼백 년에 걸쳐 박해의 상황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희생되었다. 물론 그들은 그 희생을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들이었다. 그들에게 신앙의 자유는 하나님의 승리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국가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순간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런 틈을 파고들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인 행세를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각종 행사를 위한 성당들을 지었다. 라테란 성당을 비롯하여 4개의 바실리카 건물들을 지어 그리스도교를 장려했다. 국가의 재정으로 빈민구제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그것이 그때까지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냈던 그리스도인들을 혼란하게 만들었고 경계하던 국가를 자신의 편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국가 역시 우상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때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하게 모든 폭력을 단념해야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은 폭력을 단념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직업을 먼저 포기해야 했다. 특히 군대와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먼저 그 직업을 버려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콘스탄티누스를 생각해야 한다. 그는 로마의 황제였다. 그가 로마의 황제라는 사실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주목해야 한다.

로마는 제국이다. 제국은 군대에 의해 유지된다. 로마가 군대를 가장 우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황제는 로마 군대의 수장이다. 황제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군대에 의해 유지되는 로마를 포기해야 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황제의 자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가 황제의 자리를 포기하는 순간 로마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이 끊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그도 황제의 자리를 포기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로마도 그리스도교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선택한 것은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죽기 직전에 받았다) 그렇게 그는 폭력을 단념하지 않고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좌지우지 했다. 바실리카 건물들과 빈민구제소는 그런 콘스탄티누스를 가리는 가림막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우호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는 주교들을 우대하였고 교회가 재산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의 미꾸라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체를 흙탕물로 만들었다. 거기에 편승하는 주교들이 있었고,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신학자가 등장하여 그렇게 변질된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신학을 정립하였다. 여기에서 국가는 우상이라는 본질을 감출 수 있게 되었고 국가를 위하는 것이 신앙적이라는 사고 역시 신학적으로 정립되었다.

국가가 우상의 혐의에서 자유로워지자 그리스도교는 “정당한 전쟁”이라는 신학적 근거를 만들었고, 그리스도교 안에 폭력이 자리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명백하게 폭력적인 전광훈과 그의 추종자들의 행태를 보면서도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 역시 그리스도교 안에 폭력이 자리하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고, 애국운동을 신앙으로 이해하는 사고 역시 가능해진 것이다. 그런 폭력적인 전광훈을 온누리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대형교회들이 지지할 수 있는 것 역시 그리스도교 안에 자리하게 된 폭력이 그 근본적인 이유인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이룰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당신의 자녀라고 부르신다. 그래서 바울 사도 역시 이렇게 말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평화의 종교요 평화의 사람들이었던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폭력이 용인된 것은 ‘신앙의 자유’가 가져온 가장 불행한 결과였으며 콘스탄티누스로 인한 국가와 그리스도교의 혼인은 그리스도교를 국가의 하부구조로 전락시켰다. 결국 그리스도교 안에 자리한 폭력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맘몬의 하수인으로 만들었고(힘을 추구하는 한 반드시 그렇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그 슬픈 결과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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