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환향녀, 정신대, 집단 호명에 숨겨진 이름의 정치학
이태원, 환향녀, 정신대, 집단 호명에 숨겨진 이름의 정치학
  • 김기대
  • 승인 2022.11.19 0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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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은 장미- 영화 리멤버

책임져야 할 세력이 집단 호명을 선호한다. 

왕조의 무능으로 타국에 잡혀갔던 여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자(還鄕) 그들을 통칭해서 환향녀라고 불렀다. 오늘날 여성들을 향한 멸칭인 화냥X 시작이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젊은 여성들을 전쟁터로 몰면서 그들을몸을 바친다’는 뜻의 정신대로 불렀다. 그들이 당했던 짐승같은 일들을 수치스러워하며 숨어 살던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이름을 드러내면서 일제의 만행이 공개됐다. 그들의 용기가 정신대를 종군위안부로, 종군위안부를 성노예로 실체적 집단 호명에 가깝게 만들었다.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지만 자신을 드러낸 용기있는 이름들을 우리는 존경을 담아 호명한다.

 

 

현재 상영중인 영화 ‘리멤버’(감독 이일형, 2022년)는 만주군, 한국전쟁당시 국군, 월남전 파병 군인을 거친 주인공(이성민분)이 자기 집안을 약탈하고 정신대에 다녀온 누이를 자살에 이르게 한 자들을 응징하는 통쾌한 영화다. 복수와 응징을 구별못하는 한국 영화(리멤버 포스터도 그런 점에서 실패작이다)들이 섣불리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하면서 신파로 흐르는 것과 달리 ‘리멤버’는 결말이 시원하다. 이런 결말이 가능한 것은 주인공이 자신의 과오(일제 강점기 시절 침묵도 동조였다는 자괴감)도 척결의 대상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은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며 ‘불가피한 친일파’라는 집단 호명 속에 숨지만 주인공은 그들의 한국 이름과 창씨 개명한 일본 이름을 낱낱이 부르면서 척결을 주저하지 않는다.

1945년 8월 월 24일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탄 일본 화물선 우키시마호(부도호)가 갑자기 항로 변경을 한 뒤 폭발하면서 524명이 수장되었다. 그러나 배의 공식 승선자가 3,725명인데 실종자를 사망에 포함시키면 천 여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이다.

놀랍게도 해방 이후 어떤 신문도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를 검색하면 부산지역에서 발행되던 ‘민주중보’만이 2회에 걸쳐 이 사건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사건 발생 2개월 여 후인 10월 5일자에 우키시마호에 탑승한 일본측 인솔자가 미군정에 보고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첫 기사다. 아직도 정확한 사고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이 사건을 미군정이 덮지 않았을까하는 강한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전범국임에도 처벌은 커녕 일본을 아시아의 말 잘듣는 푸들로 키우고 싶었던 미군정은 일본의 진상 규명을 그대로 믿었을 가능성이 크다. 언론의 외면으로 ‘우키시마호 사망자’라는 집단 호명조차 받지 못했던 그들의 존재는 1990년대 와서야 400여명 정도의 이름이 밝혀졌다.

세월호 참사 때 희생자들을 ‘가난한 집 아이들’로 집단 호명하려 했고 이태원 참사 때는 위패와 영정 조차 없는 무명의 ‘사고 사망자’로 호명하려던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로 부르는 시도가 어긋나자 집단 호명에 숨고 싶은 세력들은 갑자기 개별 호명을 문제 삼고 나왔다. 사법처리, 명예훼손, 유가족 동의, 외국 대사관 1곳의 항의 등등의 용어로 희생자 명단 공개를 겁박하고 있다.

권력자들은 왜 집단 호명을 선호하는가?

집단 호명 속에 숨어서 자신들의 과오를 면피하려는 속셈이다. 동시에 그들은 집단 호명을 통해 본질을 호도하고 다른 이미지로 덧입히려고 한다. 환향녀의 경우처럼 자국의 여성들을 보호하지 못한 과오를 ‘몸이 더럽혀진 여성’이미지로 치환한다. 정신대는 자발적 취업행위였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일본군들과 ‘동지적 연대감’을 느꼈다는 망발을 통해 그들의 어머니와 정신대 피해 여성을 분류함으로써 계급적 우월감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일제 강점기 계급적 우위에 있었다는 것은 친일파를 의미하는데 친일의 오명(그들이 오명이라고 느끼지도 않겠지만)보다 중요한 건 계급적 우위다.

이태원 희생자의 개별 호명을 패륜이라 일컫는 자들은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그들을 향락에 빠진 청년(그날 마약 단속이 계획되어 있었다는 보도도 맥을 같이 한다)으로 분류하고 ‘자발적으로 놀러 나가서 죽은 젊은이’들이라는 집단 호명에 포함시킴으로써 정부의 과오를 덮으려고 한다. 게다가 설익은 민족주의자들은 서양 귀신 놀음이라 조롱하고 심지어는 ‘미군철수’까지 거론하는 세력이 있으니 보수 정권의 입장에서는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현 시점에서는 싫은 소리도 아니다.

희생당한 그 누군가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없다는 점을 유가족들도 알 것이다. 그 날 즐긴 젊음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렇기 때문이 그들의 이름이 공개된다 해도 명예의 실추가 아니다. 비록 당장은 슬픔이 앞을 가려 죽음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이 불편할 수 있지만 이런 참사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견뎌 내시기를 바란다. 감추려는 자가 범인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개별호명하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러나 바빌론 포로 이후 그들은 유대인(Jewish)으로 집단 호명되면서 시오니즘으로 경도했고 오늘날 극단적 시온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국제 정치의 문제아가 되었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은희경 소설 제목)'다. 그들이 꽃으로 집단 호명되면 장미는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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