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함과 예수의 제자
신실함과 예수의 제자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12.16 06: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래 전 일이다. 나는 마당기도회의 새벽기도 설교 부탁을 거절한 적이 있다. 그때는 지금처럼 제도권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지 않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설교를 거절한 이유는 마당기도회나 사랑의교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 거절 이유를 듣고 설교를 부탁했던 사람은 그래도 그곳에 신실한 분들이 많이 계시다고 했다. 신실함으로 말하면 그곳에 나보다 더 신실한 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신실한 사람이 되기 위한 설교를 하지 않는다. 내 설교의 초점은 언제나 명확하다. 나는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복음과 세상을 바라본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내 설교의 초점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신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없다. 특히 사람들을 구별하고 심지어 설교자들까지 자신들의 수준에 합당해야 설교를 허락하는 그런 곳에 가서 나는 설교할 수 없다. 그래서 설교를 거절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웃기는 일일 것이다. 어디 되도 못한 것이 감히 그런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커지는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목사의 설교가 맘에 들지 않으면 "당신보다 내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신앙생활 했다."고 설교 시간에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곳이 된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신실한”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제자훈련을 모토로 삼은 그들의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은 사람이 제자가 되었느냐는 내 질문에 나에게 설교를 부탁했던 사람은 “에이 목사님, 그래도 그곳에 신실한 분들이 많아요.”라고 대답했다. 동문서답이다. 나는 그곳에 신실한 사람들이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 예수의 제자들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 대답을 그렇게 에둘러갔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신실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제자, 혹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요구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면 신실함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신실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대단히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자신 혹은 다른 사람들을 신실하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이 신실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예수의 제자들은 복음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다. 복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에게 저주를 들었다고 그들이 신실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신실했다. 정말 신실했다. 그러면 문제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들이 신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그들의 신실함 여부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그들이 더 중요한 요소들인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그들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생각을 해보자. 만일 바리새파 사람들이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버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신실하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그들이 정의와 자비와 신의에 몰두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불가능한 요소들을 버렸다.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도취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신실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앙의 길에서 그들은 ‘자기 의’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만 것이다.

제자훈련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제자훈련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시 말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오늘날이라면 어디에 살까를 더해야 할 것이다)를 생각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당기도회에서 내게 설교를 부탁했던 사람은 이런 내 질문을 에둘러갔던 것이다. 신실함은 그리스도인의 목표나 징표가 아니라 위선자의 목표나 징표가 된다는 사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어제 한 분이 내 글에 이런 댓글을 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못살고 있어서 좋아요를 못누르네요ㅠ 목사님...”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하나는 내가 글에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글을 쓰는 너는 정말 네가 쓰는 글의 내용대로 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 글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맞다. 내가 쓴 글의 내용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쓰는 글의 내용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나는 오래 전에 자끄 엘륄의 <하나님이냐 돈이냐>를 읽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이외에는 소망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이외에는 소망이 없는 상태란 정말 가난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끄 엘륄이 발견한 성서가 말하는 가난의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고민을 끝낸 후에 기도하기 시작했다. 가난하게 해주십사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도의 응답을 받아 가난해졌다. 그냥 가난해진 정도가 아니라 마이너스가 되어 지금까지도 신용불량자로 내 주소를 친구의 집에 올려야 하는 상태로 살고 있다. 나는 가난해졌고 나를 가난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하면서도 여전히 가난이 힘들고 버겁다. 나도 모르게 세상열락을 즐기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특히 내 가족들이 힘들어 할 때는 돈에 항복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내 모습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먼저 구하는 삶에 도전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그냥 버려두시지 않는다. 정말 눈동자와 같이 입 안의 혀와 같이 보호하신다. 나는 그것을 경험하고 늘 흔들리는 나를 추슬러나간다. 그리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런 삶이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내게 그런 내가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한 일이 없다. 하지만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사는 내 삶 자체가 예배이고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다른 예수의 제자들과 만나 교회를 이루게 된다면 그런 질문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신실함은 그리스도인의 덕목이면서 동시에 덕목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실해질 수 없다. 예수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라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이다. 그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 부족이라는 실패의 경험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아직도 자신이 할 수 있거나 하고 있는 일에 주목한다면(신실하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예수의 제자로 살 수 없다. 울면서도 씨를 뿌려야 한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도 해당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