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밖으로 나아가서
영문 밖으로 나아가서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1.05 11: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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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집사가 헌금을 횡령한 사건을 이어 목사가 헌금을 유용한 사실이 드러나 일부 그 교회 교인들이 목사를 고발했다는 후속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곳에 목사의 전원주택 사진이 있었습니다. 저는 목사가 그런 멋진 주택에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교회의 일 년 헌금액이 22억이라고 하니 교인의 수가 몇 천 명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건이 터지면 돈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저는 돈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런 목사를 본받는다면 그 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될까요? 오늘날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들이 없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제가 쓴 글을 보시는 목사님 한 분이 주일 설교에서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셨습니다. 장로님이 일어나 목사가 어떻게 교회에서 그런 설교를 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틀림없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정집사가 헌금을 횡령하고 목사가 헌금을 유용한 그 교회의 교인들 역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만큼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의 의미는 흐려지고 흐려져서 마침내 구걸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에게 4영리를 설명하고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한다고 말한 사람들도 그 자리에서 즉각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평생 교회를 다녔지만 성서 한 번 끝까지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니 평생 단 한 번 교회를 간 적이 있는 사람도 그리스도인으로 장례식을 치르는데 별 지장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정작 본인들뿐입니다.

전원주택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목사들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를 본받는 교인들이라면 모두 맘몬의 노예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도 전해질 수 없습니다. 복음은 본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가난하기만 하다고 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가난을 사모하고 가난해진 것을 감사할 수 있을 때라야 복음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저는 가난을 사모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아닌 그리스도인들은 한사코 돈의 순기능에 대해 말하며 가난을 에둘러갑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영적인 일이며 가장 복음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이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으며 돈의 노예로서의 길을 정당화합니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가난이 발붙일 곳이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저는 헌금 횡령으로 고소를 당한 그 목사가 사는 전원주택을 보고 그래서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호의호식을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렇게 살지 않기로 작정하고 그런 삶을 마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우스운 것은 그런 목사들의 공로의식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나아가 자신의 한 그 일에 대해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를 성장시킨 목사의 공로를 인정하고 그에게 거액의 돈을 마련해주는 것이 관행이 되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어떻게 이런 말씀을 목사라는 양반들이 모른 척 하고 에둘러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교자들 생각이 납니다. 그들이 순교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거들먹거리겠습니까? 오히려 더 머리를 조아릴 것입니다. 더 당당하지 못했고, 순교 당하기 전 할 수 있었던 일을 다 못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결국 교회의 성장이라는 올무에 걸려 목사는 물론 교회와 그리스도교 전체가 똥통이 된 것이지요. 그런 곳에 다니고 그런 곳에 속했다고 자신을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정말 불쌍할 뿐입니다. 

다시 본(本) 이야기를 꺼내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은 그 사람들을 본받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과정 중에 미흡한 부분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양육에 엄격한 기준과 과정을 마련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을 양육하는 이들도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을 양육하면서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갔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은 겸손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복음의 삶이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의 반사행동으로 드러나는 지점에 이르러야 그들은 마지막 세례 교육을 마친 후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은 상태에 이르러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난 후에 일어나는 일 역시 중요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지원자가(도제) 자신이 본받았던 그리스도인(장인)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 지원자는 이제까지 자신의 양육을 책임졌던 그리스도인의 자매와 형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높낮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자매와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이 사실 역시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을 한다고 난리를 치는 사람들은 자신이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고 말하고 그런 사람들을 자신의 제자들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합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역시 상황이 낫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사제와 수도자들이라는 영적인 지도자들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독신입니다. 목사들이 보이는 세습이나 헌금유용과 같은 잘못된 행동들은 사실 빈대와 마찬가지입니다. 그 빈대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독신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본의 릴레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사제를 어른으로 모시고 수도자들을 영적인 지도자로 모실 뿐 자신은 언제나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고착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제나 수도자들이 예수의 제자로서 온전히 성숙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톨릭에 평신도들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평등을 허무는 반역자가 되는 길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동방교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푸틴과 러시아의 전쟁을 지지하는 키릴 대주교가 그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총체적으로 복음대로 살지 않는 조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분들이 갈 길이 막연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안에는 늘 이런 흐름이 존재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리스도교 밖에 남은 자들을 남겨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개신교 예배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그리스도인임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가 나누어주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지 않는다고 영적으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처럼 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영문 밖으로 나가셔야 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할 차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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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2023-01-05 23:16:16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