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와의 전쟁
안티와의 전쟁
  • 지성수 목사
  • 승인 2023.01.18 07:0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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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사도행전(12)

사실 나의 온라인 사도행전은 판데믹 상황이 오기 이전 2007년부터 시작 되었다. 

지금은 완전히 식물단체가 되었지만 당시는 한창 힘을 쓰던 한기총 산하에 교회언론회라는 곳이 있었다. 마침 아는 선배 목사가 이 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기에 수 만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어서서 온라인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안티기독교 단체를 초청해서 토론을 해보자고 제안 했다. 보수 기독교 총본산에서 안티 기독교 단체를 초청하는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어서 히트를 칠 수 있다고 판단해서 기획을 한 것이다. 

사실 애초에 제안했을 때 워낙 폭발성이 높기 때문에 성사가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양쪽 모두 깊이 생각하느라고 결정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두 집단 모두 내부에서 구태여 대화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진행이 되어서 예비모임으로 반기련 회장을 포함한 발제자들이 만나서 여러 가지 가능성과 예기되는 문제점들을 검토 했다. 기자들이 많이 올 터인데 돌출 과격 행동이 발생한다면 피차에 유익할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 서로들 조심하기로 했다.

청중 보다도 취재 카메라가 더 많은 분위기 속에서 예상했던대로 행사는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다. 오죽하면 정해진 시간 10분보다도 짧았던 나의 발표가 끝나자 사회자가 '마치 롤러코스터에서 내린 심정'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행사의 결과는 안티들이 초청을 받은 자리에서 정제되지 못한 거친 감정을 드러내 보여서 '무섭게 보았는데 이 정도라면 두려워 할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한 마디로 돈 들여서 손님을 초청했더니 손님이 와서 깽판을 부리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제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병리현상의 하나로 본다면 안티현상은 그 부작용으로 파생한 히스테리칼한 정신병리현상의 일종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국의 안티 운동은 제 3자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감정과잉의 배설문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짓고 더 이상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안티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어느 종교나 가지고 있는 종교 일반의 문제를 기독교의 문제로만 보는 것이다. 종교도 시대와 문화의 산물을 일 수 밖에 없어서 세월이 가면 저절로 변할 것을 상대로 목숨 거는 것은 아무래도 부질없는 짓인 것이다. 기독교에 대하여 거품을 무는 그들에게 영적, 정신적, 인격적, 교육적으로 무슨 유익함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발제를 통하여 종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든지 어차피 개인의 결단, 고백, 성찰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인데 기독교에 그렇게 거품을 무는 당사자들에게 영적, 정신적, 인격적, 교육적으로 무슨 유익함이 있을까 하는 질문을 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쫒아 갈 수 없는 사람을 점잖게 비난하는 말로 ‘종교다원주의자’라는 것이 있다.

이는 마치 북방 불교가 자기들 보다 더 원초적인 남방 불교를 향하여  소승 불교라고 시건방을 떠는 것과 같다.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느 길로 가나 모두 정상으로 이르게 되어있다”는 뜻같이 들린다.

그런데 이 말은 "산을 올라가 보고 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산은 올라가보지 않고 먼데서 산을 바라보기만 하고 하는 것”인지에 따라서 다르다.

일단 산에 올라가 봐라. 산을 올라가다보면 길을 잘못 든 길도 있고, 가다가 끊어진 길도 있고 심지어는 골짜기로 도로 내려오는 길도 있다.

그러므로 산을 올라가 정상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맞지만 올라가 보지 않고 밑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맞지 않는 것이다.

정상에 올라가 보고서 비로소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즉 다원이 아니라 일원인 것이다. 그럼으로 엄밀하게 정의 하면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라 '종교일원주의'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다석 유영모는 귀일(歸一)로 표현 했다. 다석의 귀일사상은 하느님을 향한 구도정진(求道精進)적 삶을 뜻한다. 유영모는 예수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산 가장 모범적인 사람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를 따라가는 것이 신을 향한 다가감인 동시에 내 안에서의 신을 찾는 방법인 것이다.

경계는 자기의 것을 안전하게 지켜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타인을 배척하기 위해서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보수의 이름으로 오로지 배척하기 위해서 경계를 세우는 집단이 있는데 바로 기독교이다.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은 바로 그런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민족 종교는 어떤 길을 통하여도 결국은 천부경에 이르게 되지만 천부경을 제대로 울여먹는 곳은 증산교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민족적 자아가 확대되어  진리에 대한 겸허한 태도 보다는 지하철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종자들과 비슷한 느낌이다. 천부경. 삼일신고 등의 좋은 내용이 포장이 조잡해서 길거리 노점상 물건처럼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메뉴엘이 너무 난해해서 아무도 쓸 수 없는 물건 같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기성 종교에 대해서 너무 심하게 시비를 거는 것은 에너지 낭비일 뿐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데로 가고 나는 내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비주류의 길을 걷고 있는 내 주변에는 항상 현실종교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때문에  항상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런데 예수도 그런 무리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한 것이 바로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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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현 2023-03-17 00:48:45
예전에 MBC에서 한 분노실험이 생각나는 글입니다. 한 기자가 "게임중독으로 증폭되는 폭력성"에 대한 실험을 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PC방의 전원을 내렸던 사건입니다. 한창 진행중이던 게임과 각종 컴퓨터 작업물이 한순간에 날라가 분노한 그들을 보고 게임중독으로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며 점잖게 훈수하던 보도국. 이 기사가 똑같은 모습이네요.

목사라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이런 말과 행동을 한다면 그것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런다면 분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분은 그런 분노를 그저 "히스테리칼한 정신병리현상의 일종", "제 3자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감정과잉의 배설문화"라 매도하며 애써 태연해합니다만... 한국교회가 얼마나 썩었으면 이런 교만한 목사가 나올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