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종교다원주의냐?
당신들! 종교다원주의냐?
  • 지성수 목사
  • 승인 2023.02.09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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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사도행전(15)

아둘람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자 다른 신앙의 모습을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색깔이 분명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아둘람은 조교다원주의냐?"고 묻는 사람이 생겼다.

그런데 알고 보면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쫒아 갈 수 없는 사람을 점잖게 비난하는 말로 .마치 북방 불교가 자기들 보다 더 원초적인 남방 불교를 향하여 소승 불교라고 시건방을 떠는 것과 같다.

애초에 기독교의 배타성 때문에 종교간의 대화가 한 때 인기 있는 분야였지만 요즘 철학계에서는 '주체'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지키면서 다른 현상을 분석하는 흐름으로 옮겨가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느 길로 가나 모두 정상으로 이르게 되어있다”는 뜻같이 들린다.

그런데 이 말은 "산을 올라가 보고 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산은 올라가보지 않고 먼데서 산을 바라보기만 하고 하는 것”인지에 따라서 다르다.

일단 산에 올라가 봐라. 산을 올라가다보면 길을 잘못 든 길도 있고, 가다가 끊어진 길도 있고 심지어는 골짜기로 도로 내려오는 길도 있다.

그러므로 산 정상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맞지만 올라가 보지 않고 밑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맞지 않는 것이다.

정상에 올라가 보고서 비로소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즉 다원이 아니라 일원인 것이다. 그럼으로 엄밀하게 정의닥아면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라 '종교일원주의'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다석 유영모는 귀일(歸一)로 표현 했다. 다석의 귀일사상은 하느님을 향한 구도정진(求道精進)적 삶을 뜻한다. 유영모는 예수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산 가장 모범적인 사람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를 따라가는 것이 신을 향한 다가감인 동시에 내 안에서의 신을 찾는 방법인 것이다.

호주에 살 때 우리 뒷집에는 빌이라는 70 대 노인 부부가 살았다. 처음에 이사를 왔을 때 빌의 집과 우리 집 사이의 담장이 너무 오래되어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지만 두 집 사이는 잡나무와 줄기 식물들로 얽혀서 대강 보이지 않아서 사생활 침해를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그래도 모든 것에 각이 잡혀야 편안한 내 성격대로 빌에게 담을 새로 하자고 하니까 자기는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고 해서 성가시지만 나 혼자 돈을 내고 하기는 억울해서 그냥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빌이 자기 집 쪽의 정글을 정리하기 시작해서 집 사이가 휑하니 뚫리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판자를 가져다가 대충 막아놓았더니 빌이 무슨 이유로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는지 담을 세우자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 하자고 했더니 “급할 것이 뭐 있느냐? 크리스마스 때까지 하자.”고 했다.

그리고도 두 번의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한 번은 한국에 갔다가 돌아와보니 담장을 새로 설치했다. 그런데 담이 빌네 집으로 한 뼘은 들어가 있었다. 왜 그랬나 하고 자세히 보았더니 기왕에 있던 담장의 그루터키에 파내기 힘든 시멘트 덩어리가 있어서 공사를 쉽게 하느라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한국의 좁은 땅 덩어리, 더욱이 땅값이 비싼 도시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처럼 넓은 땅에 살기에 그까짓 한 뼘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떠올랐던 생각이다. 경계는 안전하게 지켜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타인을 배척하기 위해서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보수의 이름으로 오로지 배척하기 위해서 경계를 세우는 집단이 있는데 바로 기독교이다.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은 바로 그런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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