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가
이제 우리가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2.09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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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곳곳에서 교회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다. 예전에는 그 소리가 매우 아팠고,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조금씩 무너지지 말고 한 번에 왕창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맘몬의 신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대부분의 주류 그리스도인들은 웬 미친 소리냐고 생각할 것이다. 무슨 개소리냐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말 내가 하는 이 이야기가 미친 소리고 개소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하지만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 잘 보라. 아니 정말 다시 한 번 잘 보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예수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생각이 드는가. 그런 향기를 맡을 수 있고,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미친 생각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한동안 그런 교회에서 스스로 떠나거나 떨어져 나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졌던 적이 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매우 오래도록 여러 번 그런 기대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 지난 이십 여 년의 경험이 그것을 말해준다.

나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신앙의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고, 그래서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이 두 가지는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내가 내 신앙의 삶을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임에 틀림없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리스도를 좇고자 하는 내 열정의 결과물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첫 번째 순서가 되는 삶을 살고자 최선을 다했다. 어리석은 일들도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그리고 부족한 나를 이끌어 오늘에 이르게 하셨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끄셨다면 오늘날 요 모양 요 꼴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끄시는 사람은 요 모양 요 꼴이 된다. 모세를 보라. 바울을 보라. 그들이 위대한 사람이 되었는가. 아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데릴사위가 되어 양을 치는 자가 되었다. 자기 아들을 낳고도 할례조차 시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 후에 자신이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고 말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었다. 심지어 내 아내와 딸들도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 하겠는가. 내 글을 읽고 내게 다가왔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수틀리면 나를 짓밟는다. 심지어 정면에서 내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기까지 한다. 참으로 비참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런 모습이 내가 되어야 할 모습이며 더더욱 작아져서 존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내게 존경한다는 말을 한 사람들 가운데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다. 참으로 아픈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예외 없이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다가와 나를 존경한다는 말을 하면 그가 곧 내 곁을 떠날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 이용하시고 떠날 때 쪽박까지 깨지는 마시고 그대로 두고 조용히 떠나시라는 말을 한다. 나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새로운 일을 도모하려 하지도 않는다. 나는 가만히 있는 법을 배웠다. 아쉬움이나 기대나 바람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을 주님의 은혜로 알게 되었다. 아니 이렇게 되어야 하고 이렇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상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새로운 눈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송명희 시인의 공평하신 하나님을 나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송명희 시인이 보았던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다. 그는 자신의 장애를 통해 작은 자가 되어야 가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나도 다른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내 눈에 오늘날 교회가 더 이상 교회가 아닌 이유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짜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대 교회 지도자들이라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현재 그들이 일하고 있는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자. 결국 '말씀을 들으면', 그들은 새로운 삶의 길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유스티아누스의 말이다. 정말 그의 말은 예언대로 되었다. 특히 오늘날 구도자 중심의 사고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야기이다. 그의 예언은 마치 엑스레이나 C.T.촬영처럼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도전승>의 교회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니다. 우리의 접근법은 정반대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길을 따라 살면서 새로운 종류의 사고에 이른다고 믿는다. 만약 우리가 그들이 우상숭배, 부도덕, 살인을 행하는 상태에서 그들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말씀을 듣지' 못할 것이고, 결국 그들은 우리의 증언의 토대인 교회의 독특성을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바꿀 것이다."(254-255)

얼마나 더 적확한가. 바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이렇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서 탈출한 사람들의 뇌리에는 남아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디엔에이가 새겨져 있다. 교회를 떠났어도 말씀을 듣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교회를 떠나 여러 새로운 시도들을 할지라도 사도전승에서 말하는 교회의 독특성을 구현해내지 못하고 증인으로서의 증언을 하지 못한다.

(초기 교회의) 교리 교육은 세련된 사상이 아니라 ‘성품’과 ‘덕스러운 삶’을 낳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교회의 성장은 그리스도인들의 설득력이 아니라 그들의 설득력 있는 삶의 방식의 산물이었다.(261)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다시 교회가 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물론 교회 개혁이나 평신도 교회를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하려는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존 교회의 겉으로 드러난 잘못된 것들만을 피상적으로 건드리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나는 그런 그들의 모습들을 확인하는 정말 슬픈 시간들을 내 경험으로 가지게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가슴 판에는 말씀이 새겨졌다. 그러나 상식이 되고, 물 탄 복음이 된 말씀을 자기 가슴 판에 새겼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살 수 없고, 세상의 희망이 될 수도 없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도 없다.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를 거부할 것인가.

어떻게 이 시대의 문화를 거부할 것인가.

어떻게 망하는 것처럼 보이고 죽을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 것인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이 일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해냈을 뿐이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성하는 데에 봉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가 되어야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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