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십자가
무거운 십자가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4.13 07: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는 참 많은 비극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큰 비극은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소명으로 이어진다. 그 소명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다.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구현하는 일을 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 눈을 뜨게 되고 복음을 알게 된 것에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리고 개신교 서적들이 가장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다고 가톨릭이나 동방정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도 개신교인들 못지않게 가볍거나 무게를 잡고 거들먹거림으로써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내게 가장 큰 울림과 충격을 준 사람들이 브루더호프나 메노나이트 아미시와 같은 공동체로 사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초기 교회의 모습을 보았고,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었다. 우연히 나는 메노나이트와 관련된 책 들 몇 권을 번역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제자도 공동체 평화로 대변되는 그들의 신학에 대해 알게 되고 배우게 되었다. 제자도 공동체 평화란 결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는 예수의 제자들의 신학의 요체이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에 속한 사람들과 매우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에 속한 사람들에게 매우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가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변질되었다.

내가 개신교에 대해 더 절망하게 된 것은 내가 개신교 목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목사가 됨으로써 나는 개신교를 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만일 평신도로 그대로 있었다면 내가 아무리 모순을 깨닫게 되었어도 내가 모르는 것이 있거나 내가 평신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면 스스로 물러나거나 파문을 당하든지 둘 중에 하나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가톨릭에서 그것이 더 무서운 이유는 가톨릭이 가진 힘과 영향력이 개신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내가 가톨릭에서 배운 대부분의 것들은 파문을 당하거나 스스로 물러난 사제 혹은 수도사들에게서였다.

개신교와 가톨릭은 다시 하나가 될 수 없다. 가톨릭과 동방정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갈라진 것도 다시 합칠 수 없게 된 것도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가 변질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요즘 공동체에 관한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가톨릭과 개신교와 다른 종교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모습을 본다.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하는 것들이다. 결국 그리스도교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내가 발견한 것이고 이 사실보다 더 기쁘고 반가운 일은 없다.

심지어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진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까지 하나가 될 수 있다. 나는 데리다와 레비나스와 같은 철학자들로부터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되는 것들을 배웠다. 무조건적인 환대. 부채의식이 없는 선물, 그리고 타인을 말살하는 전체주의 등이 그런 것들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조건적인 환대는 정말 중요한데 나는 그것을 통해 내 신앙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환대에는 몇 가지 수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환대의 집에서 이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첫째, 단지 가난을 정의 문제로만 이야기하는 환대를 전혀 하지 않는 겸손한 비환대, 둘째, 봉사를 하면서도 지위 차이를 유지하지 않는 겸손한 환대, 셋째, 당신이 누군가의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 가족이 되는 포용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우리가 믿는 것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말보다 사랑이 앞서는 곳입니다. 이 세 번째가 예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희년을 표현합니다. 이것이 초기 예루살렘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이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재물을 팔아 공유했고,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습니다.’”-마크 반 스틴윅, 메노나이트 목사-

어쩌면 이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환대가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환대란 오늘날 교회에서 낯선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 한 피디가 노숙자 행세를 하며 교회를 시험한 적이 있다. 큰 교회 중에서 노숙자를 받아준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어떤 작은 교회 한 곳에서 잠을 잘 수 있었는데 새벽기도가 시작하기 전에 나가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단지 가난을 정의 문제로만 이야기하는 환대를 전혀 하지 않는 겸손한 비환대”라는 말이 이해되는가. 아마도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가난이 구조적인 문제로 정의 문제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막상 자신은 전혀 환대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겸손한 비환대라고 표현했다. 참 절묘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칫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긍휼함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노숙자 선생님들과 폐지 수거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그분들에게 상황에 맞게 약간의 돈을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일을 할 때마다 나는 뿌듯하기보다는 늘 내 자신의 믿음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나에게 빈정거리던 어떤 목사의 말처럼 왜 그까짓 돈만을 주느냐는 질책을 받을 수 있다. 나는 달게 그 질책을 받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주님이 내게 허락하셔서 내가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돈만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에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들과 같은 식구가 될 수 있는 기회도 가능할 것이다.

둘째는 “봉사를 하면서도 지위 차이를 유지하지 않는 겸손한 환대”다.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은 결코 자선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주님의 것을 가지고 생색을 내는 일이다.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노숙자 선생님이나 폐지수거하시는 분들에게 돈을 드린 후에 꼭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래야 균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가 중요하다. “당신이 누군가의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 가족이 되는 포용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우리가 믿는 것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말보다 사랑이 앞서는 곳입니다.” 섬김을 통해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된다. 그렇게 그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자매와 형제들이 된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다.

스틴윅은 이것을 예언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예언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믿고 그것을 지금 이곳에서 지키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기다린다면 그것은 예언적이 될 수 없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가족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희년을 표현합니다.”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 내가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같이 아버지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의 제자들이 날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의 의미가 여기서 분명해진다. 그것은 이 땅에서 희년을 실천하고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크고 작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봉사자와 피봉사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와 형제가 된다. 그들이 제자들처럼 누구의 십자가가 더 크냐고 계산하고 따지겠는가. 십자가는 크고 작음이 없다. 다만 누구에게나 무거울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