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4.24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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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명석에 대한 기사들이 범람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잠깐 JMS의 신학이 소대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우습게 보였지만 그것은 내가 가진 신학이라는 잣대에 그런 것이고,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은 인자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분은 다시 오신다(재림)고 했다. 그리고 정명석이 다시 오신 그분이시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펄쩍 뛰게 되지만 전체적인 성서의 맥락 속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리고 기적은 언제든, 또 얼마든지 연출될 수 있다. 그러나 연출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 기적의 원동력이 성령인지 악령인지 판단할 수 있는가. 더구나 그 체험이 자신의 것이거나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 경우라면 그것을 분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가.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런 분별의 능력도 없고, 분별의 시간을 가지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얼마든지 또 누구건 약간의 노력만 하면, 기꺼이 악해지려 하기만 한다면(파우스트에서와 같이 악마의 힘을 믿고 거기에 기대려 한다면)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도, 자신의 체험도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천지인들은 신천지인들 대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 대로, 오늘날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 대로 자신들의 신학이 옳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신학 중 누구의 신학이 옳은가. 모두의 대답은 하나다. 자신들의 신학이 옳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이단이냐 아니냐를 묻는 사람들에게 이에 대해 간단하게 대답한다. 어떤 신학이든 자신들의 신학에 절대성을 부여한다면, 다시 말해 자신들의 신학만 옳고 다른 모든 신학은 틀렸다는 생각을 한다면 바로 그 신학이 잘못된 신학이라고 말한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신 이해이다.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학문인 신학은 신의 어느 일부분만을 조명할 뿐 신을 대변하거나 전체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자신들의 신학에 부여하는 절대성 여부로 사람들의 신학을 판단한다. 인간이 신학에(대부분의 경우는 교리라고 일컬어지지만) 절대성을 부여하는 순간, 그 신학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반드시 신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신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신처럼 되는 순간이 바로 그들의 종교가 이단이 되는 바로 그 순간이 된다. 그러면 잘 생각해보라. 자신들의 그리스도교에 신과 비슷한 존재가 존재하는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신이 되거나 신과 비슷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잘 생각해보아야 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아이란 권력을 가지지 않은 작은 사람을 의미한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엇을 할 수도 없고,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이란 이렇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 의존적인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한다. 물론 그 안에서의 성장이 분명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권위를 가지고 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의존적이고 스스로 권위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과 같은 영적인 사람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복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인간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 그는 곧 하나님이 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큰 위험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힘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은 바로 이 위험에 노출되게 되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힘과 영향력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이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뒷방 늙은이로 만든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난이 추구해야 할 첫 번째 덕목이 되는 이유는 가난이 사람을 커지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가장 절대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지금 말하는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모든 면을 포함하는 가난이다.

잘 생각해보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가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대답하지 말고 그냥 마음속에 간직하기를 바란다.

가난은 더 좋은 신앙을 가지기 위한 선택사항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 가난하지 않다면 자신의 신앙을 내세우지 않아야 하며, 가난하지 않다면 아직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자본이 신이 된 이 세상에서 가난해지기로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아무리 자기 몸을 내어 불사를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이단들이 속출하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단들은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그리고 이단들의 인큐베이터가 되는 그리스도교 역시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내 말이 과도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도한 것이 아니라 너무 부드럽고, 단호하지 못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반론을 제시하고픈 그 마음이 바로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그래서 대답을 하지 말고 속으로만 간직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주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가난해지고 싶거나 가난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용기를 구하고 가난 속으로 뛰어들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맨땅에 헤딩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죽는 것처럼 느껴지고, 실제로 죽음 곁으로 바싹 다가가게 될 것이다. 죽음이 옆에서 오락가락하는 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 그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부르시고 그런 사람에게 소명을 주신다.

많은 사람이 이단에 현혹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잘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잘 보라. 정명석에게 현혹된 여자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자신이 특별하기를 바란다. 성공하기를 바라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희생은 ‘희생의 체제’이기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세상이 희생의 체제라는 사실을 알고 그렇지 않은 세상(나라)이 있다는 것을 만들어 보여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권력을 가지지 않은 작은 사람인 어린아이로 살아간다. 참 시시해 보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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