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도
내 기도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4.27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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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왔다. 그러나 나는 자매와 형제로서 만난 그리스도인이 없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자매와 형제인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실제로 믿고 삶으로 살아내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유난스럽게 까탈을 부리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게 되고 형제애를 알게 되고 각종 하나님 나라의 특성들이 여기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실재는 아는 것과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이런 관계, 그리고 그런 관계에서 비롯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한 걸음도 내딛지를 못했다.

그런 내게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 이번 책 <의도된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내서>를 번역하게 하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먼저는 거듭남이 생각난다. 미주지역을 방문했을 때마다 나는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내게 그리스도인인지를 물은 후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를 물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차림이 허름하지만 표정이 매우 온순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애초에 무시했다. 내가 목사인데 내게 다가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냐고 묻는 것이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다시 난 것은 정말 내가 거듭났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교에 올인했다.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 바친 아들로 태어나 목사가 되었고, 유무상통하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 내 재산을 다 잃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거듭났느냐는 질문은 그렇게 인식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있은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가 정말 거듭난 것인지를 확신할 수가 없다. 나는 정말 거듭난 것인가.

니고데모와 같이 머릿속으로만 긍정하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네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정말 헷갈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복음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거듭남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없다. 내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매와 형제로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거듭남을 고민하는 이유는 나의 현재 상태가 정말 거듭난 사람답게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동체를 향한 길을 걷고 있다지만 정말 내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체에 합류하지 못하거나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답답하고 무언가 속 시원한 대답을 주님으로부터 듣고 싶다. 그런데 정리 단계에 들어간 번역을 최종 정리하면서 나를 더 고민하게 하는 부분을 만났다.

“그러나 이 단순화된 그리스도인 여정의 설명에서 우리는 세 단계를 분별할 수 있다. (1) 율법주의적으로 "해야만 하는" 질문들로 이 경계를 넘고 (2) 예수님의 명령이 심판의 위협이 아니라 과정 중에 훈련이 이루어지는 제자도의 여정에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는 것이며 (3) 성부, 성자, 성령의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이전 장에서 설명한 두 번째 단계의 테오시스(우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처럼 되심)와 세 번째 단계인 페리코레시스(원을 그리며 춤추는 하나님과 합류)라는 개념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오직 유일한 소명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나는 지금 두 번째 단계에서 세 번째 단계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첫 번째 단계를 완전히 통과했다고 말하기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내 모든 것을 다 걸었다 잃고 지금도 모든 것을 다 걸고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고 있다는 점에서 첫 번째 단계는 지난 것 같다. 그리고 2단계를 지나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내 탓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일 수도 있고, 전체적으로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주님이 아직 내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직 내가 세 번째 단계를 지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물론 내가 사도 바울처럼 성부, 성자, 성령의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로써 나타나는 페리코레시스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주님의 뜻이 있어 그것을 기다리게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아직 원무(Circle Dance)를 추고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원무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원무에 참여하고 싶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창조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을 사람답게 산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늘 그것을 꿈꾸고, 특히 소외된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나는 내가 늘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로서 부족한 면이 아직도 많다고 생각한다. 운전대를 잡으면 수도승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있고, 이제는 운전대를 잡으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는 순간적으로 돌아버리기도 하고 난폭하게 보복운전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기도 한다. 누가 보지 않아도 나는 그런 내 모습이 많이 부끄럽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순간적으로 실패하는 경우가 지금도 있다. 그러나 사실 부족한 면은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들을 통해 더 많이 드러난다. 내가 자랑스러운 것은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하거나 자기만족에 빠진 경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테오시스) 제자 공동체를 통해 원을 그리며 춤추는 하나님의 자유(페리코레시스)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우리의 여정, 우리의 집, 새로운 세상을 위한 우리의 희망의 모습이다.”

내가 그런 상태에 머물거나 그 이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내가 혼자이기 때문이다. 내게 내가 속해 날마다 함께 살아가는 제자 공동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만 우리는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나는 동의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기도이다. 주님이 나를 주님의 제자들의 공동체 속의 일원이 되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든 기존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든 그런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일은 나 혼자 결정하고 나 혼자 실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설사 다른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조바심을 내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는 사십 년을 기다려야 했고,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페리코레시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 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거듭났을까. 나는 그 일이 쉽지 않음을 안다. 다른 무엇보다도 거룩한 공의회의 회원이라는 사실과 그의 신분과 그가 가진 소유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 물론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다. 그래서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의 신분과 앎이 최소한 그것을 더디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는 있다.

주님이 내게 <의도된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내서>를 번역하게 하신 일이 내게 기대와 위로를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버려야 할 것들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기도 한 페리코레시스 속으로 들어가 원무를 추며 내 삶을 마치고 싶다. 물론 그것이 내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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