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치게 그리운 공동체
사무치게 그리운 공동체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5.12 01: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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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한국인의 식판을 보았다. 이연복과 몇몇 사람들이 한국음식으로 급식을 하고 그 반응을 보는 프로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음식을 처음 먹어보며 느끼는 솔직한 감정들이 재미를 느끼게 하는 방송이다. 급식환경이 다른 곳에서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창의력을 더해 하는 그 프로는 최근의 케이팝이나 드라마 등의 인기를 업고 한국음식이라는 문화가 세계적인 음식이 될 수 있는가를 보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그 프로를 보던 아내가 한 마디를 했다. 저런 프로를 꼭 잘 사는 나라에서 진행하지 말고 가난한 나라에 가서 진행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아내의 지적은 사실 그 프로의 취지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아내의 말을 듣고 과연 내 아내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 프로에서 외국인들이 먹지 않는 음식은 그대로 버려진다. 나는 그것이 지구의 한 쪽은 너무 풍요로워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잔반을 버리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이유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한 아프라카계 미국인이 자신이 일하는 음식점에서 손님들이 먹다 남긴 음식 가운데 먹을 만한 것들을 따로 모아두었다 그것을 가져다 아이들에게 주다가 그 사실이 적발되어 그 음식점에서 쫓겨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기사의 내용 역시 오늘날 음식에 관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언젠가 보았던 버려지는 음식의 양에 대한 통계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져 우리가 사는 지구의 오염원이 되고, 그런 막대한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지구가 그야말로 수탈되고 있는 현실을 사람들은 그다지 문제 삼지 않는다.
 
우리나라 역시 그렇게 막대한 음식물 쓰레기를 생산하는 대표적인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씨앗 하나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는 사고를 지니거나 쌀 한 톨에 담긴 농부의 수고와 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제 없다. 그것이 영성 수련을 하는 곳에서 등장하는 것이 이것이 영적 사실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오늘날 종교인들 가운데 그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은 보기 어렵다.
 
사실 어려운 일이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음식물 쓰레기 제로의 삶을 살 수 없다. 나는 우리 아이들과 식당을 가면 늘 과식을 하게 된다. 우리 식구는 식구수대로 음식을 시키면 언제나 음식이 남게 된다. 하지만 식구수대로 시키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의 식당에서 눈총을 받게 된다. 아이들이 남긴 음식을 아내와 나는 모조리 먹는다. 아내의 경우는 반찬까지 싹싹 먹어치운다. 그것이 식량 정의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음식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도리라는 사실을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인식하기가 어렵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닭 한 마리를 잡거나 사와도 그것을 가족끼리만 먹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닭을 푹 삶아낸 후 고기를 따로 바르고 닭을 삶은 국물에 쌀을 듬북 넣어 죽을 끓였다. 거기에 발라놓았던 살을 조금씩 넣어 먹는 것이 당시의 닭을 먹는 방식이었다. 지금은 그런 방식을 백숙이라고 하지만 당시는 그런 조리방식을 따로 의식하지 못했다. 그렇게 끓인 닭죽을 커다란 그릇에 한 그릇씩 담아 집집마다 돌리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집들도 그랬다. 그렇게 닭죽 한 그릇이 오면 그것은 참 행복한 사건이 되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런 일이 바로 살아 있는 공동체 의식이었고, 그것이 바로 식량 정의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며칠 전은 내 생일이었다. 마침 결혼하기로 한 막내의 상대가 처음 우리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나는 집에서 삼겹살을 먹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 주로 한우나 토마호크를 구워먹는다. 그런데 내 생일에 삼겹살을 먹는다고 하니 아이들이 자신이 소고기를 사오겠다고 했다. 그것을 만류했다. 그리고 우리 집을 처음 방문하는 사위 후보에게 말했다.
 
“자네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려는 것이야. 우리의 만남은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가 만나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부차적이야. 그냥 너희들이 이렇게 찾아와주고 함께 음식을 먹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야,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스스로 원해서 자주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삼겹살을 먹기로 했어. 이해해주기를 바래.”
 
삽겹살에 어묵탕, 그리고 손자 녀석이 좋아하는 감자전이 내 생일 음식이었다. 옥상 목욕통에 흙을 담아 키운 상추가 한 몫을 했다. 아이들과 손자에게 상추를 따라고 했다. 손자 녀석의 솜씨가 가운데를 뜯어놓은 상추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옥상에 그늘 텐트를 치고 그곳에 앉아 삼겹살 세 근으로 내 생일 잔치를 풍성하게 지냈다.
 
선물은 사오지 못하게 했다. 예전에는 언제나 부족한 것과 가지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필요한 것이 거의 없다. 결국 사치하게 되고 비싼 것을 사게 되어 있다. 필요한 것을 파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돈 봉투가 선물이 되었고, 돈 봉투는 그 틈을 이용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을 사전봉쇄 한 것이다.
 
믿음은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서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한다. 그러려면 게으르게 살 수 없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하면 그것을 게으름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나는 내 삶에 복음이 담기지 않는 것을 게으름으로 인식한다.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그것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는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 하는 사람은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개인이 행한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방법으로 이해하고 실천했던 것이며 그것은 예수님의 오이코스에서 제자들과 이미 경험했던 연대의 확장이었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이 공동체는 새로운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한 맥락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인 삶을 공유하기 위한 수단이자 목표이다.”(<의도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내서>에서 인용)
 
이 짧은 내용에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이 들어있다. 다시 한 번 잘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다. 그래야 한다는 생각조차 거의 하지 않는다. 때론 입으로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럴 생각이 없다.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그것을 인식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것이 제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고, 만일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이 행한 영웅적인 행동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방법으로서의 그러한 행동은 보거나 기대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가 되었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의 오이코스가 될 수 없고 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자신들이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나눔을 통해 느끼거나 연대를 통해 느끼는 경우는 완전히 사라졌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공동체 역시 사라졌고, 그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가 되었다. 그런 공동체가 제자들을 양육하고 훈련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인 삶을 공유하기 위한 수단이자 목표”라는 사실 또한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사망선언과 같다고 생각한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제자들은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한다. 이 엄청난 예수님의 요구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온 인류를 하나님의 풍요(샬롬)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온 피조세계를 살리는 비책이다. 음식은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이며 필수적인 결핍의 한 요소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그 일에서 악한 역할을 할 수는 없다.
 
오늘 아침도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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