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most Christian
Almost Christian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6.07 02: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Almost Christian이다. 이런 말을 해야 하는 나는 슬프다. 사실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 출석하는 교회가 없다.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라고 하는 곳들은 내가 알게 된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완성된 교회란 없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완성된 교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안다. 완성된 교회는 언제나 미래형 혹은 지향점으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교회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최선을 다해 살 수 있게 해주는 교회이다. 물론 교회가 완성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의 구성원인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아닌 결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로서 그리스도인은 무한자이신 하나님의 방식을 지키고 고수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의라고 믿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거룩할 수 없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신다.

애초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함은 애초에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 사실을 모르실까?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왜 인간에게 당신에게만 가능한 거룩을 요구하실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거룩하지 못한 인간, 거룩할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도전할 때 거룩하지 못한 인간이 가장 거룩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거룩은 바로 인간으로서 살아낼 수 있는 이 최선의 거룩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의 하나님 백성인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생각을 해보자. 그러면 온전함과 거룩함은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온전하라는 예수의 요구는 구약에서 말하는 거룩하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다만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이스라엘이었기에 다시 반복해서 거룩하라고 하시지 않고 더욱 분명하게 온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 뿐이다.

거룩하라는 요구와 온전하라는 요구의 의미를 사도 베드로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또 다른 방식으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는 이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거룩함과 온전함이다. 하지만 우리는 베드로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대한 약속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초기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원시공산사회와 같은 교회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룬 유무상통하는 공동체인 교회가 바로 위대한 약속들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분량만큼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초기교회 역시 완성된 교회는 아니었다. 성서는 그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달리 소유를 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초기교회에는 이미 가난한 사람이 없어질 정도의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바로 이와 같은 교회(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결코 공동체 밖에서 양육될 수 없고, 생겨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이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 자신도 공동체 없이 하나님 나라의 개시를 알릴 수 없었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목사인 내가 스스로를 Almost Christian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겸손도 아니고 자기비하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정말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고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집에서 예배를 드린다. 우리 가족 셋이 전부이다. 우리는 우리 가족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 공동체 연습을 하고 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 바로 초기교회와 같은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가정들과 마찬가지인 그냥 가정이 아니라 교회로서의 공동체인 가족이라는 사실을 최근에 인식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가족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완전히 타인인 다른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 교회 공동체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래서 나는 Almost Christian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교회는 반드시 한 곳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함께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유무상통할 수 있는 자매와 형제로서의 그리스도인 동료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 가정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얼마 전에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나는 결핍의 상황에 처했고, 그 상황에서 나는 나를 도울 수 있는 몇 사람을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돈을 빌리거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었고, 내가 신뢰하고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인 동료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시험의 기회였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런 신뢰와 사랑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결핍의 상황에 전혀 다른 상황을 보여주셨다. 전혀 모르는 분이, 그것도 가톨릭 신자인 분이 내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겠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물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고, 오로지 성령에 자극을 받아 어렵게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내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또 나 역시 그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있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평소와 다르게 그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신용불량자인 나는 채권자들의 확인 전화를 받지 않기 위해 모르는 전화번호로 온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것으로 주님은 내게 내가 그리스도의 공교회의 일원임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래서 미흡하고 부족하지만 우리 가족으로 이루어진 우리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보고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을 계속 갈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내용을 잘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알아볼 수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Almost Christian이다. 하지만 주님이 그런 나를 Almost Christian이 아닌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주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나를 Almost Christian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대로 죽어도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날, 내가 비로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