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나 교회가 되라
교회를 떠나 교회가 되라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5.1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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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엔조이에서 본 기사의 제목이다. 나는 기사 내용을 읽지 않았다. 제목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단에 속한 사람들을 지탄한다. 그들을 아무리 설득해도 그곳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다르게 본다. 간혹 의심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그루밍”이라는 단어를 이용해 설명하려 한다.

그루밍이란 피해자의 호감과 신뢰를 얻어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것으로, 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해를 당하고 있는 사실을 인식하기 어렵고 인식하더라도 그 탓을 자신에게 돌리게 된다. 그런데 이단에게만 그루밍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회들에서도 똑같이 그루밍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목사와 교회가 아무리 도리에 어긋나거나 반 복음적인 일을 행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을 하는 경우라도 그것을 합리화하기 때문에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잘못을 지적해도 그것을 수용할 수 없게 된다. 명성교회나 그 밖의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래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위의 기사 제목에서 보듯이 그들은 무한정 커지려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아들이 자신보다 문화적 역량이 크다고 말하는 것에서 보듯이 그들에게는 큰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작아지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커지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되었다. 작아지려는 사람들이 간혹 나타나지만 그런 사람들은 커지려는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그들의 잘못된 방향을 지적할 수 없다. 그래서 작아지려는 사람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곳에서 스스로 물러나거나 쫓겨나게 된다. 스스로 작아지려 하지 않고 다만 작은 사람들의 편이 되려는 사람들 역시 작아지려는 사람들과 동일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복음과는 상관없는 곳이 되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그리스도교에서도 스포츠 스타와 같이 상품성을 따지고, 비싼 선수들만이 활동할 수 있는 곳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말을 아무리 해도 아무런 소용도 없다. 내가 하는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실제로 결단과 행동을 요구하면 두 말 하지 않고 돌아선다. 저주나 욕을 하지 않고 돌아선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반복해서 이런 경험들을 축적해가고 있다.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가톨릭 신자인 분에게 ‘가톨릭이라는 우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동안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분 정도면 충분히 받아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우물이라는 내 표현에 불쾌감을 표시하고 이후에 내가 단 댓글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분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톨릭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좋은 것일까? 물론 모든 것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고, 이런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래서 옳고 그름으로 나누거나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어떤 것이든 거기에 절대성을 부여하느냐 부여하지 않느냐에 따라 성숙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는 그동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교회를 떠나라는 말을 했다. 물론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가장 먼저는 그리스도교 자체가 변질되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떠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떠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내가 교회를 떠나라는 것의 주된 의미였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또 다른 의미는 교회란 본디 떠나는 곳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교회를 절대로 떠나지 않고 떠나지 않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분들의 입장에서는 옳다. 그러나 그것은 좋게 말해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이고, 보다 정확히 말하면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성서에 기록된 교회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라. 어디에 교회가 절대로 떠나지 않는 곳이라고 말하는 곳이 있는가. 성서는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길 뿐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대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도 그곳에 서신을 보냈고, 그곳에 자신이 동역자로 여기는 사람들을 보냈고, 자신이 가보지 않은 교회 역시 같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동일한 관심과 사랑을 가졌다.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도들 역시 그랬고, 바울 이후의 사람들 역시 그랬다. 그래서 교회란 떠나는 곳이었고, 떠나는 것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절대로 떠나지 않는 곳이 되었다. 떠나는 것을 배신으로 인식하거나 다른 교회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적대심이나 적개심을 표현하지 않기만 해도 다행인 그런 그리스도교가 되었다. 

봄이 되어 총동원주일을 하는 교회들이 많아졌다. 그런 교회의 교인들은 내게 다가와 친절하게 전도지나 초대장을 주면서 거기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자신의 이름을 대거나 자신을 찾아오라는 설명을 곁들인다. 교회가 상을 주어 교인들의 경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헛웃음이 나온다. 이 사람도 그루밍이 된 것이다. 그루밍이 된 사람들은 결코 성령의 인도하심을 인식할 수도 따를 수도 없다. 이것이 진정한 그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물론 그런 그들은 절대로 교회를 떠나지 못한다.

공동체에 관한 책을 번역하면서 머리에 쏙 들어오는 내용이 있었다.

“물론 견습 회원은 시험 기간이 지나면 부끄러움이나 약속을 어긴 경험 없이 자유롭게 탈퇴할 수 있다. 하지만 언약 구성원의 경우는 어떤가? 몇몇 공동체는 언약 구성원이 되는 것을 정직한 별거의 가능성이 없는 평생 동안의 결혼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것이 가장 유력한 비유라면, 이탈은 이혼, 배신으로 경험되고, 이탈을 넘어 지속적인 관계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결과는 보통 일어난 일에 대한 아주 다른 두 가지 이야기이며 양쪽 모두가 희생자처럼 느낄 수 있는 각본이다.”

이 내용을 번역하고 다시 정리해가면서 나는 성숙한 공동체란 떠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는 공동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저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나는 결혼에 대한 비유가 공동체 서약의 성격을 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공동체를, 예수님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막 2:27)라고 하신 안식일에 비교하는 것이 더 나은 비유일 것이다. 공동체의 목적은 그 회원들이 예수님의 더 나은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를 충실히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누군가가 다른 환경에서 주님을 더 잘 섬길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소속된 공동체는 이러한 가능성을 처리하는 데 열려 있어야 한다.”

공동체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 역시 그래야 한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성숙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공동체뿐만 아니라 구성원들 역시 자라 성숙해진다. 더욱 귀중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 확장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이탈을 이혼과 배반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안녕을 도모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의 우물이 되었다.  

“교회의 목적은 그 회원들이 예수님의 더 나은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를 충실히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이 내가 작금의 교회를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이며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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