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대로 사는 삶과 그리스도교 신앙
신념대로 사는 삶과 그리스도교 신앙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6.17 00:2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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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모부는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모부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종교가 문제였다. 이모부는 한 그리스도교 이단 종파의 신앙을 가졌다. 건설 노동자로서 평생 가장 신실하게 일했지만 번 돈의 대부분은 헌금으로 드려졌고, 가족들은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내가 내 이모부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삶이 신앙, 다시 말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오래된 일이지만 이모부는 정말 행복하게 사시다 돌아가셨다. 물론 그걸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분은 정말 신실하게 사시다 돌아가셨다.

바로 앞집에는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끌었던 “나는 신이다”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이었던 이재록 목사의 교회인 만민중앙교회를 다닌다. 혼자 사는 사십 대 혹은 오십 대의 여인이다. 몇 번 마주쳐 인사를 한 적은 있지만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녀가 드나드는 것은 소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녀가 나오거나 계단을 지날 때는 언제나 큰 소리로 설교가 울려 퍼진다. 우리 집과 맞닿아 있는 화장실에서도 그녀가 듣고 있는 설교 소리가 들린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참 대단한 믿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녀가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특히 오늘날 교회를 다니면서 복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런 믿음을 가진 그녀가 더 나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최소한 그녀는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모부도 그러셨을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무책임한 것은 이모부만이 아니다. 나야말로 무책임의 대명사가 아닌가?

차이는 미묘하다. 거의 인식할 수 없을 만큼의 아주 작은 차이가 존재할 뿐 믿는 대로 산다는 점에 있어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히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같이 치유와 ‘소확행’을 추구하는 함량미달의 그리스도교와 비교하면 최소한 서로에게 비빌 수 있는 언덕이 되어주는 이단들이 훨씬 더 낫다고 할 수밖에 없다. 행복이라는 측면에서도 만족도가 훨씬 더 높다는 것을 나는 오래도록 보아왔다. 오늘날 정상 혹은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교는 결코 이단들을 감당할 수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피하거나 적대시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정통이라는 사람들은 반 복음적인 안티크리스천들이 된다.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가장 강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호승심이다. 호승심은 이기려는 마음이다. 처음 어느 단계까지는 이 호승심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이 바른 신앙을 위한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기려는 그 마음은 경쟁이라는 피할 수 없는 반 복음의 길을 달려가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잘 하려는 생각에서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호승심은 복음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게 한다.

어쩌면 그것인 인간이 가지는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신앙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기도 하고, 고된 영적인 수련을 통해 기껏 영적 오만함으로 자신을 망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그런 마음, 즉 호승심을 버리고 경쟁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일 호승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결국 오늘날 이단과 정통의 공통된 일탈과 같이 인간 중심의 종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며칠 전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축구 대표 팀이 이탈리아에게 졌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건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영적으로 치명적인 이 호승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축구가 아니라도 자신이 지지하거나 응원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호승심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누구든지 호승심이 내면화 되어 있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서도 경쟁의 마음을 가지고 이겨야 한다. 우리가 오늘날 보고 있는 대형교회들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 대형교회 목사만이 아니다. 대형교회를 나가고 있는 모든 신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겨야 한다. 커져야 한다. 결국 호승심을 버리지 못하는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거나 그 일에서 실패한 사람들이다.

그렇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그 어떤 길을 가거나 어떤 일을 하던 그것은 무의미하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모든 일탈은 바로 이 자기 부인에서 실패하거나, 자기를 부인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내가 이단에 관한 이야기로 오늘 글을 시작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이단과 정통이 아무런 차별이 없으며,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오히려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단들을 따라갈 수 없다. 그들을 적으로 돌리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 정통이라는 교회들은 싸우지도 못한다. 싸우면 패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 전 동료 목사님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랑으로 신천지(우리 시대 이단의 대명사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가 될 수는 없냐는 질문을 했다가 미친놈 취급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자기를 부인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만일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그것을 안다면 잘못된 신앙의 길에 빠진 신천지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길 것이다. 그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신천지 사람들을 보듬어 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실은 진정한 사랑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왜 신천지를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완전한 사랑을 지향점으로 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그래서 긍휼과 환대 대신 미움과 차별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신천지인 출입금지라는 표지판 앞에서 절망한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자기를 부인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을 부인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신천지인들도 회피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단과 정통은 서로를 미워하면서 자신들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행복을 원한다면 이단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최소한 자신의 신념대로 산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다. 그 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사랑을 배우고 익히게 된다. 그 길에서 두려움과 징벌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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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in M Kim 2023-06-17 12:05:33
Amen.

이충현 2023-06-17 11:38:40
신천지 성도들을 사랑으로 품자는 것... 좋은 말씀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단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는데도 거기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으시니 미완성의 글처럼 느껴집니다. 성경에 분명 나와있습니다. "9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요이 9-11)"
이런 말씀이 버젓이 있는데 왜 여기에 대한 설명은 이 글에 빠져있는지요? 신천지의 출입을 허가했을때 우리는 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합니까? 아니면 말씀대로 안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