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오래 참고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6.21 04: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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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에 댓글이 달리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댓글이 달리는 경우가 없습니다. 물론 제가 쓴 글의 소재가 대형교회인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댓글이 달립니다. 그런데 대형교회를 소재로 쓰지 않은 글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신천지 성도들을 사랑으로 품자는 것... 좋은 말씀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단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는데도 거기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으시니 미완성의 글처럼 느껴집니다. 성경에 분명 나와 있습니다.

"9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요이 9-11)"

이런 말씀이 버젓이 있는데 왜 여기에 대한 설명은 이 글에 빠져있는지요? 신천지의 출입을 허가했을때 우리는 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합니까? 아니면 말씀대로 안해야 합니까?//

제 글에 “신천지 사람들을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는 없는가?”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질문이 이분의 마음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우선 댓글이 무척 예의바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댓글의 내용으로 보아 젊은 목사님으로 보입니다.

일단 저의 졸글에 댓글을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또 좋은 지적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지적해주신 내용이 오늘날 교회가 취하고 있는 일반적인 태도이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말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성서에 인용하신 말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서에는 인용하신 말씀보다 더 큰 맥락의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어렵고 힘들지만 저는 이런 말씀들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날 교회들이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에 속수무책이 된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가 고린도교회와 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에는 유명한 사랑절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런 편지를 써야했던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사랑절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랑에 대해 강조해야 했던 이유가 바로 위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랑이 제일이라고 강조해야 했던 이유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실제로 위의 내용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지식에 능통했고, 각종 다양한 은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실천하는 신앙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돌보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하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쳐야 했고(고전13:8), 그래서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역할과 바울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서로를 오래 참음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이란 인내입니다. 초기교회에 정통한 앨런 크라이더는 그래서 그것을 “인내의 발효”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인내가 발효해야 서로를 돌보는 일은 가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고린도교회에서 무너지고 있었던 것은 서로를 돌보는 사랑으로 구축되는 공동체였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도 제자공동체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선교를 지상최대의 과제로 생각하여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을 특별히 “대위임령”이라고 강조해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명령을 주시기 전에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셨고, 그것은 대위임령의 대 전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는 선교를 지상최대의 과제로 삼음으로써 서로 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등한시하고 마침내 상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교회의 공동체성보다 전도나 선교가 더 강조되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우선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증인이 되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은 그들이 이뤄내는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물론 그들이 이뤄내는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이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런 공동체입니다. 선교나 전도의 본질은 바로 이 공동체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보고 매료될 때 선교는 폭력이 아니라 자발적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동체 속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증인이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면서 “오래 참음”을 가장 앞에다 두었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은 마지막에 두었습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사랑의 우선순위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바른 깨달음을 통한 성숙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해와 관용,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서로를 돌보는 일상의 삶이었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와 선교의 전제라는 사실을 바울은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알려진 바울은 명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사랑의 우선순위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바른 깨달음을 통한 영성개발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오래 참음으로 돌보는 섬김에 있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지배했던 더 중요한 원리는 진리에 대한 토대를 둔 기독교 교리가 아니라 서로를 돌보는 애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에 함몰되고, 은사에 함몰된 고린도교회의 공동체성을 보고 간절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고린도교회의 성도에게 보내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은) ‘눈물의 편지’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 편지를 보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발견하고 돌아섰습니다. 고린도후서에는 그것을 보고 기뻐하는 바울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공동체에 모든 것이 걸려있음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그런 공동체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바울이 말한 사랑을 통해 공동체가 될 때, 또 역으로 공동체를 통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그 사랑이 회복될 때,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공동체 안에서만 그리스도의 향기가 피어오를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한 사랑은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교회가 참된 공동체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해줄 때, 신천지 사람들은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고 누리는 사랑을 사모하고, 로마 시대의 이방인들처럼 그 사랑에 매료될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랑의 길에서 댓글을 쓰신 분과 만나 손을 잡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소중한 댓글에 감사를 드리며,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저는 어떤 권위도 없는(얼마든지 무시하거나 버릴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자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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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in M Kim 2023-06-27 02:24:18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