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들의 성욕을 막으려다 고문기술자가 되었다
소년들의 성욕을 막으려다 고문기술자가 되었다
  • 김기대
  • 승인 2024.01.24 17: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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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톺아보기) 칠레의 신흥종파 콜로니아 디그니다드

콜로니아 디그니다드(Colonia Dignidad)라는 칠레의 신흥 종파가 있다. 영어로 하면 Colony Dignity, 우리말로 하면 존엄의 식민지다. 쓰라린 식민지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는 불편한 단어이지만 스텐리 하우어 워스의하나님의 나그네 백성영어 제목에도 식민지가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콜로니아 디그니다드는존엄이 지배하는 외국인 공동체라고 번역하는 편이 나을 하다. 왜냐하면 칠레에 존재하던 독일인 신앙 종파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독일 출신의 교주 쉐퍼는 2 대전 위생병도 아닌 시신을 들것에 담아 옮기는 병사였다.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그는 뛰어난 언변으로 2 대전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돌아온 소년병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현재 칠레 감옥에 갇혀 있는 그의 측근은 16살때 수십명의 소대원이 몰살당할 겨우 살아남은 6명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쉐퍼는 침례교회 소속의 인기있는 청소년 지도자였는데 갑자기 교회에서 해임된다.

독립한 그는 산기도중하나님의 공동체 만들라는 음성을 듣고 1956 땅을 사서 청년 공동체를 만들었다. 2 대전 종전 이후 10여년만에 이룬성공이었다. 공동체에는 고아들 아니라 2 대전 패전 이후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도 위탁이란 이름으로 버려졌다. 하지만 이들을 신앙으로 교육시키고 고아(탁아)원의 역할도 하니 정부 관계자들도 호의적으로 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았다. 빠른 성공에 심취한 그는 소아성애자 여서 특히 소년들을 자기의 방으로 불러 들이다가 1960 고발당하자 외국으로 도피했다.

콜로니아 디그니다드에서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있는 폴 쉐퍼.
콜로니아 디그니다드에서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있는 폴 쉐퍼.

 

여러 곳을 떠돌던 그는 가는 마다 소년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독일에서 나갈 인연을 맺었던 주독일 칠레 대사에게 마침 연락이 와서 칠레에서 당신의 청소년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는다. 칠레는 19세기 스페인 지배에서 벗어난 프로이센과 수교했기 때문에 독일인 이민자가 많던 곳이었다. 칠레로서도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는 쉐퍼의 운동이 필요한 때였다. 1960년대 후진국들이 그랬던 것처럼 선진국의 탁아 시스템을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무려 300장의 칠레 비자를 받아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칠레 남부로 이주해서 콜로니아 디그니다드를 세운다. 독일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던1961년의 일이었다. 소련으로부터의 패배 기억이 생생하던 시절 베를린 장벽은 공산당에 대한 공포를 더했다. 칠레로 이주하자는 쉐퍼의 제안이 먹힐만한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다. 가난한 칠레도 땅만 상으로 공급했지 모든 독일인 특유의 성실함으로 개간해야 했다. 너무 황무지여서 지역 주민도 별로 없는 곳에 그들은 공동체를 일구고 병원을 세웠다.

밖에서 보기에는 유럽인들이 가난한 마을에서 고생하는 모습이 칠레 현지인들에게 자극이 되었고 가까운 병원이 40킬로미터나 떨어진 마을에 생겨난 병원은 지역사회의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안은 곪아가고 있었다. 강제 무상 노동이나 다름없는 노동력 착취가 있었고 10 초반의 아이들도 노동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사내 아이들에 대한 쉐퍼의 성착취도 끊이지 않았다.

자신은 성착취를 하면서 한창 건강한 소년들에게는 자위를 지옥에 가는 짓이라며 겁박하면서 강력하게 막았다. 그들의 밥에 성욕을 감퇴시키는 약을 타고 때로는 강제로 주사를 놓았다. 그래도 안되면 전기 고문을 시켰다. 이를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는 때의 일을 기억하는 증언들이 많이 나온다.

별탈(?) 없이 꾸려나가던 공동체에 위기가 닥친 것은 칠레에서 사회주의자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부터다. 공산주의가 싫어서 칠레까지 왔는데 칠레에 좌파 정부가 들어서는 일은 공포였다. 아옌데 정부에서 일어나던 토지 몰수 재분배 사업의 여파가 그들에게 미칠까 전전 긍긍했다. 쉐퍼는 자선사업재단 이름으로 하는 수입품은 통관검사를 안하는 법을 이용해 무기를 밀수하고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무기를 생산한다.

1973 우파 피노체트 일당들이 쿠데타를 획책하고 있을 우파 지도자가 이곳을 찾아 협력을 부탁한다. 유사시에는 쿠데타에 무장병력을 참여시키자는 말과 함께 그들은 쿠데타 이후 여기 고문실을 이용할 것을 약속한다. 아이들의 성욕을 억제하기 위해 만든 전기 고문 장치가 성인들이 죽어 나갈 만큼의 장비로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쿠데타는 성공하고 존경받던 의사 출신의 아옌데는 쿠데타 세력에 항복하는 것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쪽을 택한다. 이후 콜로니아 디그니다는 아옌데 정부의 비밀 고문실로 이용된다. 저녁마다 위에서는 공연이 열리고 지하 비밀 시설에서는 전기 고문으로 죽거나 실려나갔다.

1996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8년간 도망다니다가 2005 체포되었다. 이후 칠레의 감옥에서 보내다 2010 죽었다. 하지만 콜로니아 디그니다드는 해체되지 않고비야 바비에라'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수백 명의 신자가 활동 중이다. 이들은 신앙촌을 일종의 독일 민속촌 같이 만들어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2차대전 이후 시작된 쉐퍼의 종파는 지나친 반공주의, 청소년들의 성욕에 대한 겁박, 우파 정부에 대한 기독교의 맹목적 지지 등이 어울려신앙촌고문실 이용되는 희한한 결과를 나았다.신흥종파들이 배교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있는 일이지만 이처럼 정부의 고문대행기관이 것은 종파 운동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일 것이다.

콜로니아 디그니다드는 넷플릭스에 6부작 다큐멘터리가 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는 같은 제목으로 아마존의 프라임 비디오에서 시청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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