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의무화는 종교적 농노 제도
십일조 의무화는 종교적 농노 제도
  • 신성남
  • 승인 2014.06.25 14:23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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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목수의 십일조

▲ 신성남 ⓒ <미주뉴스앤조이>

근자에 한국에서 가장 큰 장로교단의 헌법 개정안에 '십일조를 안하면 교인 권리를 중지한다'는 내용의 기발한 조항이 포함되어 큰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격한 반대 여론 때문에 그대로 시행이 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비록 단 한 줄밖에 안 되는 짧은 조항이었지만, 그것이 한국교회 상층부를 장악한 일부 교권주의자들의 비릿한 속내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십일조를 해야 교인의 권리를 지닌다"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천국에 가는 권리'조차 값없이 받은 성도들에게 감히 할 말이 아니지요. 주님의 은혜로 천국도 무임승차하는데 그 잘난 교단의 교회당에 무임승차하면 안 된다는 논리는 정말 가소로운 것입니다.

게다가 미국 어느 대형 교회의 목회자는 "만일 90일 동안 십일조를 잘 냈는데도, 성경에 약속된 대로 축복을 받지 못한다면 교회는 당신이 낸 십일조를 100% 환불해 주겠다"고 호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고가의 주택에 살며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연봉이 무려 10억 원이 넘는다지요. 하여튼 이젠 미국에서도 한국식 '기복적 십일조 영업'의 짭짤한 묘미를 어느 정도 눈치챈 느낌입니다.

자원적 십일조와 의무적 십일조

구약 성경에는 대략 3가지 종류의 십일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 야곱의 십일조, 그리고 율법의 십일조입니다. 이들 십일조는 그 시대적 상황이나 바치는 조건과 방법이 모두 다르지만 그럼에도 그 근본 정신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 중 앞의 두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십일조가 아니며 모두 일시적이고 자원적인 십일조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정기적인 소득이 아니라 일회적으로 얻은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그나마 야곱이 서원한 십일조는 어디 가서 누구에게 바쳤는지 그 결과조차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율법의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라고 명령하신 '강제적이며 의무적 십일조'입니다. 이는 설사 하기 싫어도 반드시 내야만 하는 신정국가 특유의 조세적 십일조였습니다. 가나안 정복 이후에 땅을 받지 못한 레위 지파의 생업을 지원하고 또한 그들이 담당하고 있는 '성전 제사 제도'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추가적인 다른 용도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거나 성전 관리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까지 존속하였던 이 율법의 십일조는 불과 한 세대 후에 로마 군단에 의한 예루살렘성의 멸망과 함께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물론 성전과 제사와 제사장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런 연유로 사도들의 초기 신약 교회에서 율법의 십일조가 시행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 후 속사도 시대나 교부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세 교회가 본격적으로 타락하기 전까지 적어도 수백 년 동안 공교회에 공식적인 십일조 제도란 결코 없었습니다. 한참 후대인 8세기에 가서야 십일조를 법령으로 제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이전에는 십일조가 없었다는 반증입니다. 물론 성전이 없고 제사장이 없는데 어디 가서 십일조를 하겠습니까.

지금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앞의 두 '자원적인 십일조'를 계승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율법의 십일조처럼 정기적이며 의무적인 십일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이런 식의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교회는 별로 없습니다. 유럽엔 거의 전무하고, 미국의 일부 교회들 역시 자원적 십일조를 받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일부가 시도하고 있는 의무적 십일조는 결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가 없는 인간이 자작한 위조품인 셈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아브라함은 '단 한번' 십일조를 하였을 뿐인데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마치 레위인들마저 함께 십일조에 이미 참여한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레위인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따라서 만일 한국교회가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자원적 십일조를 계승한다면, 구태여 지금처럼 '정기적이며, 의무적으로' 신약 역사에 사례가 없는 변종 십일조를 따를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냥 구약 율법의 십일조를 직접 계승하려는 것이라면, 이제라도 다시 부지런히 성전을 짓고 레위 제사장을 구해서 '토지 소산'의 현물 십일조를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물론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일조를 하셨을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목수셨습니다.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고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 가난한 아버지 요셉에게 물려받은 별도의 토지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은 십일조를 하셨을까요? 물론 그 정답은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래도 양자택일을 해보라면, 필자는 안 하셨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싶습니다. 그 우선적 이유는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받았던 제사장 멜기세덱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일조의 진정한 주인이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꾸로 성전에 가서 제사장에게 현물 십일조를 바쳤다는 가정 자체가 다분히 어색하고, 또한 신약 성경에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셨다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초대 교회가 요즘 한국교회처럼 십일조를 그리 중시했다면,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일조에 대해 적어도 수차례 강조하며 필히 언급을 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 당시 십일조란 오직 토지 소산의 '현물 십일조'뿐이었습니다. 십일조를 하려면 율법의 규정에 따라 반드시 성전에 가서 소산물을 제사장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토지가 없으면 그 소산물도 없는데 어떻게 십일조를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가난한 어부였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소유한 토지가 없었다면 제대로 십일조를 못 했을 것입니다. 기타 의사나 이발사나 요리사나 천막 기술자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던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직업에서 얻은 소득으로 십일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사도들 대부분이 이런 '비십일조 직업군'에 속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아무튼 소득이 있다고 무조건 십일조를 한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원적 십일조든 율법의 십일조든 소득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적 십일조는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한 것이고, 율법의 십일조는 반드시 율법의 규정대로 토지 소산만을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신약 초기 교회들은 대부분 유대가 아닌 이방 지역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전과 제사장이 없던 이 지역에서 유대 율법에 따른 성전 십일조를 시행할 수 없슴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은 신약 성경에서 단 한번도 십일조를 하라고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예 십일조의 시행 자체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데 무슨 그런 엉뚱한 권면을 하겠습니까. 그 결과 초기 수백 년 동안 신약 교회에는 그 어떤 종류의 십일조 제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억지로 변형하여 부활시킨 것은 한참 후대의 부패한 중세 교회였습니다. 성전과 제사장이 없는데 교회당 창고에 현물 십일조를 바치라고 기만한 것입니다. 하지만 번역 성경조차 손에 없던 당시의 신도들이 그 무슨 이론적 저항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저 교권을 쥐고 흔드는 교황과 사제들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 이런 암흑 시대를 깬 것은 바로 16세기 종교 개혁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날 유럽의 교회에서 십일조가 다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현대 가톨릭조차 십일조를 폐지했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중세 십일조'를 그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신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이 억지임은 교권주의자들도 잘 압니다. 그래서 이들은 말을 다소 바꾸어 '십일조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하니 그에 따라 '자원적 십일조'를 하자고 주장합니다.

신약 교회에 의무적 십일조는 없다

필자도 자원하는 것이라면 십일조는 물론 그 어떤 종류의 헌금이라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은 아주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얼마든지 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할 점이 있습니다.

한국의 상당수 교회는 말로는 자원이라고 명분을 만든 후, 실제적으로는 자원이 아닌 '강요'를 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술한 어느 교단이 그 좋은 예입니다. 강남의 어느 대형 교회 역시 정관까지 개정하며 그런 속수에 합류하려 합니다. 정작 마땅히 시행해야 할 교회 장부 공개는 원천적으로 기피하면서 십일조만은 더 철저히 걷겠다는 심보이지요. 하지만 '십일조를 안 하면 교인 권리를 제한하겠다'는 발상이 과연 자원하는 헌금 방식입니까. 그 외에도 십일조를 안 하면 교회 내에서 직분상의 차별이나 사역상의 불이익을 받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이게 정말 자원하는 제도인지요. 공교회가 정말 정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한번 물어보십시요. 현행 한국교회의 십일조 제도가 연보처럼 진정 '자원하는 헌금 제도'로 정직하게 시행되고 있나요. 아마 '그렇다'고 답한다면 지나가던 동네 바둑이도 꼬리를 돌리며 비웃을 겁니다.

오늘날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23:2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현대 십일조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 분명히 적혀 있으니 지금도 '할례'나 '제사'를 해야 한다는 논리 만큼이나 무지한 것입니다. 특히 말라기서를 인용하며 십일조를 강조하는 목사는 지극히 용감무식한 사람입니다. 만일 구약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면 뭐 때문에 신약이 필요했을까요. 그냥 계속 동물 제사나 지내지 뭐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신약의 예수님은 구약의 불완전성을 완결시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문자주의적 논리라면, 복음서에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5-6)." 하신 말씀이 현재도 문자 그대로 이방에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해석해야 하나요? 성경은 그 쓰여진 시점에서의 상황을 고려하여 바르게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언급하신 시점은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인 구약 시대였습니다. 그 시점에서 예수님은 할례도 지키셨고 율법의 절기도 지키셨습니다. 당연히 십일조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의 십자가 사역은 이 율법의 조항들을 종결시키고 그 본래의 정신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유대 신정국가 시대가 아니고, 신약 은혜 시대인 지금 이방 지역인 한국땅에서 토지 소산은 커녕 직장을 다니거나 자영업을 하고 있는 신도가 구약의 원리를 따른 유대 지방의 십일조를 교회에 의무적이며 정기적으로 해야 한다면 얼마나 엉뚱하고 비상식인가요.

종교적 농노 제도

따라서 다소의 극평을 용서하신다면, 요즘 한국교회가 시행하고 있는 변종 십일조는 과거 중세 십일조처럼 성경을 억지로 짜깁기하여 명분을 만들고, '자원' 이라는 고소한 버터를 듬뿍 발라 교권주의자들의 식탁에 잘 차려 놓은 고지방 비만용 간식거리로 전락할 우려가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런 징조들을 충분히 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십일조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과연 성도들이 십일조 때문에 큰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그동안 십일조로 복 받은 한국교회가 이 모양 이 꼴로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회가 되어 이제는 세인들에게 '비리 백화점'이란 조롱까지 듣고 있나요.

또한 십일조를 성실히 하는 성도들은 모두 영육으로 만사형통하고 있습니까. 모두 부자로 무병장수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십일조를 철저히 잘해도 못 살고 병으로 고생하시는 신실하신 장로님들과 목사님들은 어찌 해석해야 합니까. 또한 아무리 십일조를 잘해도 처절하게 고생하시는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은 어떻게 설명하시려는지요. 아니면 전 세계 기독교인 중에 불과 5%도 안 되는 십일조 신도들만이 영적인 복을 받아 성령 충만하게 살고 있다는 것인지요. 반대로 십일조를 안 하고 있는 대다수 외국 교회 경건한 성도들은 모두 쭉정이들이라는 말인가요.

율법의 십일조는 구약 '성전 제사 제도'를 지탱하고 또한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던 중심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그 구약의 무거운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제 기능 또한 신약 교회에서는 자원하는 연보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로자의 거의 과반수가 비정규직인 이 고달픈 시대에 다시 중세 교회 농민처럼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라고 요구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 대형화로 돈과 권력에 취한 교권주의 목사들입니다. 비정규직 교인들 대부분은 소득을 전부 다 써도 늘 부족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부모나 형제나 친인척을 돌보기는 커녕 자기 가정조차 버티기 힘듭니다. 더구나 가족 중에 환자라도 한 사람 생기면 도리어 빚 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일조가 실제 어디에 쓰이고 있습니까. 어떤 교회에선 구제, 선교, 그리고 교육 등은 그저 명분일 뿐이고 외형을 키우고 교세를 키워 교회 자산을 늘이는 데에 쓰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는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하거나 또는 이런 저런 명목을 달아 교회의 돈을 빼먹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연봉이 4억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교단 누구도 못 말리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논리가 막히면 십일조 옹호자들이 슬그머니 내놓는 단골 메뉴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분의 일 정도를 바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을 합니다. 필자 역시 그런 생각을 굳이 따라다니며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십일조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어느 분이든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하십시요. 물론 십분의 일 이상으로 더 많이 하셔도 좋습니다. 특히 십일조를 그토록 몸바쳐 사랑하시는 귀족 목사님들은 한 분도 빠짐 없이 모두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공교회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현대 십일조를 함부로 의무화하거나 제도화하여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라는 사람들이 말로는 자원이라고 기만을 하면서, 실제로 뒤에서는 사실상 의무화하여 매달 십일조 내역이나 점검하며 무고한 교인들을 헌금 액수에 따라 평가하거나 폄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십일조는 극소수의 믿음 좋은 신도들이 하는 자원적 헌금이었습니다. 십일조 안 한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던 교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영리한 교권주의자들은 이를 '의무적 헌금'으로 둔갑시키고 거룩한 교회를 그저 '돈 내고 복 받으라'는 무당 종교로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한국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유래가 없는 물질적 호황을 누리고 외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된 듯 하지만, 동시에 그 넘치는 돈으로 인해 사이비한 종교 귀족들을 양산하며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가장 타락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십일조 강요의 근절 없이는 교회의 바른 개혁이 요원한 이유입니다.

한국교회는 결코 가난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진정 타락하고 망한 시대는 언제나 소위 성직자란 자들이 호사를 누릴 때였슴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목수의 십일조란 없다

본래 목수의 십일조란 없습니다. 목수는 예수님 당시에도 십일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토지 소산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오늘날 교회가 목수에게 십일조를 강요한다면 이는 얼마나 엉뚱하고 몰상식한 일인가요. 신약 교회의 의무적 십일조도 없습니다. 성전과 레위 제사장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도들은 구약의 묵은 율법 조문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성전을 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신자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신약의 성도들은 이미 십일조와 관계없이 넘치는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인위적인 십일조 의무화는 사실상의 헌금 강요 행위입니다. 그리고 헌금 강요는 무조건 종교적 범죄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오직 이단이나 사이비에 가까운 교단들이 늘 십일조를 강요하여 중세 영주처럼 신도들의 등골을 휘게 했을 뿐입니다.

"십일조 잘해서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은 대단한 종교적 기만입니다. 그러면 그 옛날 나사렛 마을의 그 목수는 십일조를 안 하셔서 그렇게 평생 가난하게 고생하며 사셨나요? 한국교회는 지금 가난한 자로 오셔서 평생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님 삶의 의미를 얼마나 곡해하고 있는지 깊히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고도 가난한 이들은 정말 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아직도 생각하십니까. 성경을 다시 읽어보십시요. 성경은 오히려 '부요한 자에게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눅18:22)"는 주님의 말씀은 지독하게 안 따르는 한국교회가 유독 이 철 지난 십일조만은 목 매달고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말 신도들이 복을 못 받을까 안달이라도 난 것일까요. 지금 의무적 십일조를 다시 부활시켜 강요하는 것은 구약의 성전 제사 제도를 종결시킨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진보나 보수에 관계없이 전통적으로 칼뱅과 웨슬리를 비롯한 개신교의 주류 신학자들 가운데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특히 미국의 석유 재벌 록펠러가 십일조 잘해서 부자됐다는 식의 유치한 말은 제발 멈추십시요. 그가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교활한 기업인이었는지 자세히 아시는지요. 아무튼 그런 조잡한 논리라면 십일조는 커녕 온갖 잡신을 숭배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잘사는 것은 어찌 설명하시려는지요. 결국 2000년 교회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은 명백합니다.

언제나 십자가 정신이 훼손된 곳에 십일조 강요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로마서7:6)."

신성남 /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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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말 2014-07-01 04:44:32
관리자님께,
먹사 ... 이런 용어로 물을 흐리는 댓글러에 대해서 정화 작업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돈 뺴 먹는 먹사들 2014-06-30 11:45:22
문제는 십일조를 악용, 남용, 오용 하는 먹사들입니다.
교회 돈 빼다가 자기의 집 장만, 월급 과다 책정, 먹사들 품위 유지비, 등등 돈 빼 먹는 것 둥등이죠.

십일조 찬성 2014-06-29 10:36:43
신앙이 시작단계인 분들께는 억지로라도 바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저의 경우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해왔는데 아주 세상의 경제가 어려울 때도 신발이 닳거나 옷이 헤진 적이 없었고, 자녀들도 십일조 이상의 생활을 하는데 상상을 넘어서는 인도하심을 늘 경험합니다. "돈벌어서 남주자", "세상 무엇보다 남편 아내 자식 부모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자"가 교육방침입니다
레위인들도 십일조를 바친 것을 보면(민18:26) 꼭 토지소산만 가지고 십일조를 낸 것은 아닙니다. 십분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바치는 것이 신약의 정신입니다

지나가는이 2014-06-29 02:13:37
저는 십일조도 하고 가난한 이도 도우려고 애씁니다
절대로 부유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 크신 은혜로 이끌어 주심을 매일 경험합니다
두가지 모두 힘을 다하여 약간 무리할 정도로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아시고 60년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천번 만번이나 옳으신 말씀 입니 2014-06-28 08:47:35
저도 십일조를 하지만 부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쓰여지기를 바랄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