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안 교수가 말하는 '일상의 삶과 목회'
강영안 교수가 말하는 '일상의 삶과 목회'
  • 강영안 교수
  • 승인 2019.08.07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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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안 교수
강영안 교수
다음은 제11회 미국 워싱턴 목회자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에서 칼빈신학교 강영안 교수가 ‘일상의 삶과 목회’에 관해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편집자 주-

5일 저녁에 열린 멘토링 컨퍼런스 첫 강연에서 강영안 교수는 ‘일상의 삶과 목회’를 주제로 ‘일상의 삶이 무엇인가?’, ‘목회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둘이 어떻게 관계가 되는가?’, ‘성경은 목회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답을 찾는 과정에 관해 설명했다.

목회란 무엇인가?

목회에 관한 이 물음은 철학적 질문이다. 마치 철학자들이 ‘정의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물음을 통해 일정의 정보를 획득하기보다 삶의 방향과 생각이 바뀔 수 있는 답을 추구해야 한다. 안다는 것은 information에 관한 것이 아니라 transformation이다. 단순한 정보 취득보다는 삶의 방향과 생각이 바뀔 수 있고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하다.

유다서에서도 자신을 세우며 자신을 지키라고 말한다(20-21절). 공자도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말하며 공부의 목적은 자아의 성찰을 통해 자기를 세우기 위함이라고 가르친다. 이번 컨퍼런스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다. 스킬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본질에 관해 생각할 계기를 제공하고 싶다.

공부란 자전거 타는 것과 같다. 자전거의 구조에 관한 공부만으로는 자전거를 탈 수 없다. 실제로 타봐야 한다.

인생도 살아야 사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부딪쳐서 넘어지고 깨어지는 과정이다. 자전거도 그런 과정을 통해 탈 수 있게 된다. 자전거를 보는 사람에서 타는 사람으로 바뀌듯이 신학, 철학 등을 안다는 것이 information을 수집하는 정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transformation이 일어나는 정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전거를 잘 타는 수준이 되면 즐길 수 있게 된다. 컨퍼런스를 통해 informed된 사람이 아니라 내가 바뀌게 되는 경험을 하기 바란다.

공자는 논어에서 “지지자(知之者) 불여호지자(不如好之者), 호지자(好之者) 불여낙지자(不如樂之者)”라고 했다.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뜻이다.

성경에 관한 지식이 정보에 그치지 않고 그 말씀을 살면서 넘어지고 깨어지고 상처나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바뀌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경지 혹은 그런 차원에 들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목사로 번역된 포이멘(poimen)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18번 나오는데 한글 성경에서는 에베소서 4:11 한 구절만 목사로 번역이 되고 나머지는 목자로 번역이 되어 있다.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위 구절을 보자. 목사는 성도를 세우는 존재이다. 여기에 ‘세우다’는 동사는 ‘카타르티조’라는 단어를 썼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이 동사의 분사형인 ‘카타르티존타스’라는 동사가 그물을 깁는 장면에서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를 다니시며 제자들을 부르실 때,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었다.

온전케 한다는 말을 그물과 같이 생각해보자. 그물을 왜 깁는가? 그물이 찢어지면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야고보와 요한은 고기를 다시 잡기 위해 그물을 깁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역자로 세우셨다. 싸매고 치유하고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그래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병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세우는 것은 그런 것이다. 회복 훈련시켜서 성도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 목회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 나라의 시민,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서 온전히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일의 종류와 귀천을 떠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세우는 것이다. 목사와 교사를 세우는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위 구절에서 13절은 원문에 보면 '~까지'라는 말로 시작을 한다. 정도 혹은 척도를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척도에까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키의 크기에까지 이르도록 세우는 것이다. 15절 그리스도에까지 자라게 하는 것,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데까지 성장시키고 자라게 하는 것이 목회이다. 얼마나 귀한 일인가?

‘신앙생활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을 때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거죠’라는 대답을 하곤 한다. 물론 그것도 귀하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세상에서 성도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함이다. 그래서 교회는 정말 소중하다.

세상은 무엇인가?

엄밀한 의미에서 세상이란 말은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히브리어에 세상이란 단어는 없다. ‘올람’이라는 단어가 있기는 하지만 세대의 의미가 더 어울린다. earth를 세상으로 번역하긴 했지만 신약에서의 cosmos와 같은 의미의 단어는 없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할 때의 세상은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의 방식을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과 삶의 방식을 따르는 것을 ‘세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할 때 그 세상은 극복의 대상이고 무찔러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세상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거나 사탄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 세상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만드셨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을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는 말씀이 있다. 세상은 양면성이 있다. 빛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이 그 빛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빛에 대적한다. 세상을 얘기할 때 세상에 대적하는 의미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세상 등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지으셨으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세상은 사랑의 대상이고 회복의 대상이다.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구인가?

요 17장에서 예수님이 아버지께 기도를 드릴 때 세 가지의 기도를 드렸다. 첫째, 자신을 위한 기도이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 둘째,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셋째는, 20절부터 나오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도 포함된 모든 예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 기도 속에서 제자들과 세상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은 “나는 세상이 있지 않지만 제자들은 세상에 있습니다”라는 구절이다. 제자들의 제자들인 우리 모두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회복의 대상이 되는 세상이다. 이 세상에 예수의 제자들이 살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인간을 ‘세상에 살고 있는 존재’로 정의한 철학자는 하이데거다.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세상에 있는 존재로 규정했다. 세상에 던져진 존재. 한문으로 '피투성'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기투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거머쥐고 미래를 향해 다시 던져야 하는 존재이다.

내 자신의 결단이 필요하다. 내가 내 삶을 거머쥐어야 한다. 성경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규정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요한복음 17:6에 이렇게 쓰여 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세상에서 빼내어서, 즉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서 아버지의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삼으신 존재이다. 더 이상 세상이 주인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제자들이고 우리는 그 제자들의 제자들이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불려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된 존재들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삶을 공유해야 한다. 우리의 신분을 결정하는 것은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것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이 어렵다.

아버지의 것으로 삼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보통 구원받았다고 말할 때 타이타닉처럼 곧 파산될 배에서 구명보트를 통해 구원을 받은 상황을 떠올릴 때가 많다. 일부만 선택된 것처럼 서양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가르쳐왔다.

18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말한다. 우리는 태어났기 때문에 그냥 사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탈출하도록 부름받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대적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제자들과 우리를 그 속으로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라고 보내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내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온 우주를, 온 삶을 다스리신다는 소식이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선포이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무엇인가?

‘목회는 무엇인가’란 물음에 돌아가보자. 세상으로부터 불러 모은 사람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내는 일, 그 일에 부름받은 사람들이 목회자들이다.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 부름받은 사람들이 성도들이다.

일상 속에서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믿는 이나 안 믿는 이나 병, 사고, 다툼 등의 일상을 공유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건강하게 부자로 잘 살다가 가는 이도 있다. 먹고 마시고 자는 일상은 차이가 없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믿고 감사하는 삶이 기독교인의 삶이고 그렇지 못한 삶이 불신자이다.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신 은혜가 있다(common grace).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구원의 은혜다(saving grace).

성도들을 싸매주고 치유하고 양육해서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이 목회자의 역할이다. 목회자도 상처나고 다치고 아프기 때문에 더 큰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셔서 그 직분을 맡긴 사람들이 목회자들이다. 디모데는 '가르치는 장로'들을 더 존경할지니라고 했다.(“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딤전 5:17)

사탄의 전략은 성도들로 하여금 “열심히 믿어라. 그러나 교회에서만 열심히 믿어라. 세상은 내가 통치할테니...”라고 누군가 하는 말을 들었다. 가정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성도는 세상으로 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도록 부름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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