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 복음서의 저자는 로마의 건국시조
니고데모 복음서의 저자는 로마의 건국시조
  • 김기대
  • 승인 2022.10.12 13: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니고데모 복음서(1)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세례를 뒤로 미룬 이유

아이네아스(Aeneas) 고대 로마의 시조로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아이네이스(아이네아스의 노래)’ 주인공이다. 베르길리우스는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신곡에서 그는 지옥과 연옥의 안내자로 단테의 길안내를 맡았다. 저승여행이라는 신곡의 모티브도 서사시아이네이스로부터 빌어온 것이다.

아이네아스는 누구인가? 트로이 전쟁 트로이의 목마 안에 숨어있던 그리스군이 목마에서 나와 트로이 성을 함락시키기 아프로디테(미의 여신)가 그의 아들 아이네아스에게 트로이에서 도망치라고 덕에 아이네아스는 목숨을 건졌다. 이런저런 신화적 과정을 거쳐 아이네아스는 텍시테아와의 사이에서 아들 로물루스를 낳았다. 이런저런 전설을 거쳐 로물루스와 동생 로무스가 배가 침몰했지만 형제만 살아남았고 그곳에서 늑대에게 길러지던 형제가 세운 나라가 로마다. 로마제국은 트로이로부터 출발한 것이고 로물루스의 아버지 아이네아스는 실질적인 로마의 건국시조다.

초대 교회 핍박의 가해자였던 로마와 교회의 관계는 양날의 칼이었다. 로마의 문화를 인정하자니 신앙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부정하기에는 그리스 로마의 문화적 토대가 너무 강고했다.

초대교회의 신학에 신플라톤 주의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없는 사실이지만 대중들에게 다가 가기에는 신화의 도움이 필요했을 터인데 참아내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화의 인물이 거론될 성서의 기록자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적 전통을 애써 외면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4세기 초를 전후해서 조금씩 교회의 영향력이 확대될 즈음에니고데모 복음서라는 책이 등장했다.

John La Farge, Visit of Nicodemus to Christ, 1880, oil on canvas,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William T. Evans, 1909.7.37
John La Farge, Visit of Nicodemus to Christ, 1880, oil on canvas,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William T. Evans, 1909.7.37

 

교회는 '제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다. 그 자리에 니고데모 복음서가 있다. 외경인니고데모 복음서에서 아이네아스는 경비병의 이름이다. 영어 번역본에는 총독 경호원(the propraetor's body-guard)으로 나오고 고대근동 연구가 송혜경 박사는 경비병으로 번역했는데 글에서는 송혜경의 번역을 따랐다(‘외경연구 1’, 한님성서연구소). 로마의 건국 시조로 여겨지는 신화적 인물 아이네아스가 니고데모 복음서에서는 한낱 경비병이라니! 비중이 경비병이기는 하다. 그는 니고데모가 히브리어로 것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니고데모 복음서에는 500 종류의 사본이 있다. 송혜경은 이것을 크게 A B 버전으로 나누면서 A 4세기 중반 무렵에, B 5~6세기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아이네아스라는 로마인들의거룩한 이름 경비병의 이름에 사용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는 쓰기 어려운작명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니고데모 복음서가 3세기 처음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니고데모 복음서는빌라도 행전으로도 불리는데여기서 악타 필라티(Acta Pilati) 빌라도의 행적을 담았다는 뜻이 아니라 빌라도의 명령으로 작성된 일지, 공식문서라는 뜻이다.”(송혜경 252). 사도행전의 행전(Acts) 아니므로빌라도 행전이라는 명칭은 옳지 않다.

 

5~6세기 본에서는 아이네아스가 경비병이라는 설명은 빠져 있고 니고데모 복음서를 히브리어로 처음 기록한 사람으로 나온다. 3~4세기 본에서는 아이네아스가 히브리어 번역가였다면  5~6세기 본에서는 히브리어로 직접 복음서를 작성한 인물로 격상되었다.

송혜경은 본래 히브리어 버전 같은 것은 없었다고 주장한다(당연히 지금 존재하는 히브리어 본은 없다). 위경의정경성 강조하기 위해서 마치 히브리어 원본이 있는 것처럼 번역자를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경비병 아이네아스는 가상의 인물이고 로마의 건국 시조를 고려한 작명이 틀림없다. 3~4세기 본에서는 직급은 낮지만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로마인으로, 5~6세기 본에서는 복음서를 기록한 신실한 복음서 저자로서의 유대인 인물을 창조해 것이다.

경비병 혹은 총독의 경호원으로 유대인을 채용할 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5~6세기 본에는 경비병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아이네아스는 유대인이 된다. 이로써 기독교는 로마제국과 떼려야 없는 관계를 맺게 된다.

콘스탄티누스가 4세기 기독교를 공인하기는 했지만 그는 거의 죽을 때가 되서야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으면 죄를 짓지 못한다는 걱정에 가능한 한 세례를 뒤로 미뤘다. 또한 로마를 중심으로 형성되려는 교회를 남겨 두고 자신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갔으니 로마 지역의 교회는 구심점을 잃게 되었다.

물론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 공의회를 열게 하는 교회사에 많은 기여를 것은 사실이다. 자크 고프는서양중세문명(문학과 지성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설의 주인공이 될 만하다고 썼다. 다시말해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앞두고 꿈에 예수가 나타나 그의 승리를 보장해 줬다는 전설은 기독교인에게는사실이지만 자크 르고프같은 학자에게는 전설일 뿐이다. 자크 르고프는 세례도 뒤늦게 받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렇게 교회에 우호적이었을가를 의아해 하면서 이런 표현을 것이다.

어쨌든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없는 로마에서 로마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송혜경을 비롯한 많은 니고데모 복음서 연구가들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니고데모 복음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서방교회(Roman Catholic Church) 안착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복음서. 비록 위경의 지위지만 교회내 핵심 그룹에서 교회의로마성 위해 썼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증거가아이네아스라는 이름이다. 송혜경은 그의 뛰어난 연구업적에도 불구하고아이네아스 의미를 놓친 하다. 5~6세기는 침략자 게르만족, 고트족 등이 이탈리아에 들어와 있었고 이미 그들 일부가 개종하면서 로마내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을 때였으므로 교회가로마적 정통성 갖는 것은 더더욱 필요했다. 마침내 4세기부터 떠돌던니고데모 복음서 개작해 새로운 버전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