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지옥에 갈 자는 누구인가, 이태원 그 후
정말 지옥에 갈 자는 누구인가, 이태원 그 후
  • 김기대
  • 승인 2022.11.11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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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지옥 하강은 잊혀진 죽음은 없다는 배려 (니고데모 복음서 2)

예수가 지옥(하데스)에 간 것으로 된 사도신경을 개신교에서도 고백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성공회를 제외하고 나머지 개신교 사도신경에서 ‘지옥’은 사라졌다. 성공회 사도신경에는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되어 있다. 가톨릭에서는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번역했다. 지옥, 죽음의 세계, 저승의 신학적 함의는 차치하고라도 ‘지옥’이 주는 어감에 불편함을 느끼는 신도들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최초의 신앙고백 형태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16:16)에 여러가지를 덧붙히면서 공통의 신경(신조)을 완성해 갔다. 각 지역에서 조금씩 다른 형태로 고백하던 것을 니케아 공의회에서 지금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공인했다. 그리스도 중심의 고백이던 것이 양성론과 단성론 등 여러가지 신학적 이견이 표출됨에 따라 삼위일체 신학을 그 중심에 놓은 것이 니케아 신조다.

니케아 신조를 비롯한 여러 주요한 신조를 비롯해 암부로시우스 신조, 밀라노 신조 대부분의 신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옥 하강을 언급하지 않았다. 7세기 이후 지금의 형태로 굳어진 것으로 보이는 사도 신경에 지옥이 들어갔는데 그랬을까?

단테의 지옥편을 그린 보티첼리의 여러 그림 중 한 점, 파란 옷을 입은 이가 고대 그리스 시인 베르길리우스고 붉은 옷이 단테다. 니고데모 외경을 썼다고 하는 베르길리우스는 고대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 틀림없다.
단테의 지옥편을 그린 보티첼리의 여러 그림 중 한 점. 파란 옷을 입은 이가 지옥을 안내하는 고대 그리스 시인 베르길리우스고, 붉은 옷이 단테다. 니고데모 복음서를 썼다고 하는 아이네아스는 고대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시에서 따온 이름임에 틀림없다.

 

서방 세계는 공인된 교회 출범 이전, 그러니까 그들이 교회에 대한 핍박을 일삼을 교회 밖에 있던그들 선조의 행위가 걱정되었다. 지난 니고데모 복음서(1)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들은 로마제국과 교회의 일체성을 강조해야 했다. 마침 베드로 전서 3:18-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있던 터라 그것을 근거로 예수의 지옥 하강을 집어 넣은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 전서의 구절로는 부족했고 다른 성서적 전거(典據) 필요했다. 이런 필요성에 따라 니고데모복음서가 쓰여졌을 것이다. 니고데모인가?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 물었던 사람이지만 예수를 고백한 사람은 아니었다. 예수를 통한 구원의 교리가 확정된 후의 입장에서 보면 니고데모는 교회 공인 이전의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지옥에 갔다. 게다가 그는 예수의 죽음 이후 예수의 무덤에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근쯤 가지고 갔었다(요한 19:39). 예수 죽음의 순간 가장 지근거리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의미다. 니고데모 복음서가 빌라도 행전으로 불리는 이유도 같은 의미다. 니고데모와 빌라도, 예수의 지옥하강을 설명하기 위해 소환하기에는 딱 좋은 조건을 가진 인물들이다.

니고데모 복음서에는사탄이 저승 하데스에게 예수님을 고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송혜경이 요약한 니고데모 복음서 21장, 22장은 다음과 같다.

 

사탄은 예수님이 한낱 인간일 뿐이라면서 그분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말하는 것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유다인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죽게 했으니 저승에 붙잡아 두라고 한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예수님께 돌아간다. 예수님께서 저승에 오시자 태초부터 저승에 갇혀 있던 죽은 이들이 모두 되살아난다. 저승이 텅비게 것이다. 그리고 거꾸로 사탄이 저승에 영원히 갇히는 신세가 된다. 사탄이인간 뿐이라고 했던 예수님이죽음 이기신 , 사탄을 저승에 영원히 가두신 하느님이심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송혜경, ‘외경연구 1’, 한님성서연구소)

 

이러한 배경을 가진 예수의 지옥 하강은 한국 개신교에서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지만 영어 신경에는 남아 있다 (descended into the realm of death).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목회적 접근이 필요하다.

칼뱅은 표현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육체적, 영적고통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해석했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에 따르면 4세기 중반 이후 예수의 지옥 하강이 시리안 마르쿠스(Syrian Marcus of Arethusa at Srimio) 의해 신조에 추가된 적이 있으나 후로 한동안 표현은 없었다. 한스 역시 지옥이라는 말이 주는 거부감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본래 헬라어 하데스(히브리어 스올) 선하고 악함에 관계없이 모든 죽은 자들의 영역, 가치 중립적 단어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즉시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나뉘고 그에 따른 징벌적 의미의 지옥이라는 단어(히브리어 게헨나, 라틴어 인페르눔) 통해 중세 교회의 지옥 신학이 자리잡았다. 헬라어 성경에는 선악의 가치를 담은 지옥이라는 말이 없으며 교회가 라틴어 성경을 사용하면서부터 강조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스 큉은 개념을 합쳐서죽은 자의 세계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공간에서 전 크리스찬(pre Christian- 서방 세계의 교회 공인 이전에 죽은 이들) 현대의 비크리스천을 향한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다라고 주장한다.(한스 , ‘Credo-The Apostles’ Creed Explained for Today ‘ 참조).

예수의 지옥 하강에 대한 해석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 죽은 자의 세계에서 일어날 구원의 가능성은 전적으로 죽은 자의 세계로 하강한 그리스도의 선택이다. 라너의익명의 그리스도인개념도 여기서 가능해진다.

지난 10 29 대한민국 이태원에서 젊음을 향유하러 나왔던 젊은이들 150여명이 압사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안타까운 죽음을 놓고 '서양귀신의 놀음'이니 '퇴폐적인 문화'니 하며 애통하며 분노하는 유가족과 시민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저주들이 있다.

희생자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을 것이다. ‘죽음의 세계 하강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타깝게 죽은 이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잊혀진 죽음과 소외된 죽음을 찾아 예수가 그곳으로 갔다는 것이 신구교가 함께 나누는 사도신경에 담겨 있는데 한국의 신구교는 피해자가 아니라 책임져야 할 자를 위로하는데 바쁘다.

한스 큉은 우리에게 되묻는다. 예수의 지옥 하강이 상징이라면 천국에 오른(‘하늘에 오르사’) 상징일까? 그가 스스로 묻고 답한 대답은 ‘No!’. 죽음의 세계에서 이루어질 구원의 가능성과 함께 세계에 영원히 잔류할 사람들도 있다는 의미다. 누구일까?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 달콤한 언어로 책임져야 할 자를 위로하는 자들, 피해자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자들을 위한 지옥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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