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를 노예로 팔아 버린 예수
도마를 노예로 팔아 버린 예수
  • 김기대
  • 승인 2022.04.08 11: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마행전 이야기(5) 인도 교회는 누가 세웠을까?

성서에서는 역할이 미미했던 도마가 어쩌다가 인도교회의 창시자로 명토박아졌는지는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한신대에서 가르치던 이장식 교수의 ‘아시아 고대 기독교사(기독교문사, 1990)’에 따르면 인도 교회를 세운 도마가 누구였던 간에 3세기 경 인도 교회가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며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도 인도 교회 대표자의 이름이 등록되어 있었다.  교회를 세웠다는 도마가 예수의 제자 도마인지 예수의 쌍둥이 형제 도마인지 아니면 제 3의 인물이 그 이름을 도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인도 교회는 있었다는 말이다. 당연히 그 기원이 궁금해 진다

 

도마행전에 따르면 인도에 가서 선교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도마가 거역하자 그를 인도 사절단에게 노예로 팔아 버린다.

 

도마가 그 말(인도만 제외하고 다른 곳은 어디든 가겠다는 말)을 한 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인도의 군다포르스왕으로부터 파견된 Chaban(Habban)이라는 사람이 목수를 사고 싶다고 하자 주님은 자신에게 목수 노예가 있으니 팔겠다고 말했다. 주님은 도마를 부른 후에 Chaban에게 은덩어리 3개(Three bars of unstamped)에 팔아 버렸다.

"요셉의 아들이며 목수인 나 예수는, 인도의 왕인 군다포르스의 상인 Chaban 당신에게 유다(도마)라고 하는 내 노예를 팔았음을 확인한다”는 거래 확인서를 작성했다. 그를 Chaban에게 데리고 가자 그가 도마에게 “이 사람이 네 주인인가 ?"라고 물었고, 사도가 그렇다고 하자 Chaban은 “내가 너를 샀다”며 거래 사실을 확인했다. 사도는 말없이 가만 있었다. (도마 행전 2장 축약 번역)

 

이 본문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첫 번 째로 도마행전의 이 본문이 사실(일 리 없지만)이라면 예수는 노예 거래에 한 당사자였던 셈이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만난 오네시모(빌레몬서)의 면천(免賤)을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노예제 폐지에 부정적이었다는 현대 신학의 비판적인 접근도 있는데 이 시각을 그대로 가져 온다면 예수는 노예거래에 대해 아예 무감각했다. 사도바울과 도마행전의 시차가 약 200년인데 도마행전의 저자에게는 사도바울이 오네시모에게 보여주었던 최소한의 연민과 배려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인도 선교를 위해 노예의 신분을 감수하라는 식으로 이 ‘사건’을 해석한다면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두 번 째로 도마행전이  ‘주’라는 표현을 즐겨 쓴 것으로 보아 사도행전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도바울이 ‘주(Kyrios)’를 쓰기까지 가졌던 많은 고민과 저항(키리오스는 황제에게만 쓰던 용어였으므로)을 이해하고 썼는 지는 알 수 없다. 1~2세기 만큼 박해가 심하지 않았던 3세기에 쓰여진 도마행전의 ‘주’에는 그런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세 번 째인데 도마의 값이 은덩어리 3개(Three bars of unstamped)였다. 원전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원전에도 ‘unstamped’로 되어 있을 것이다. Unstamped? 이른바 ‘납세필증’이 없는 실버 바였다는 말이다. 왕이 파견한 인도 상인이 허가받지 않은 은을 사용하는 밀매업자는 아닐 터이니 예수가 ‘가이사의 것’은 받지 않았다는 세심한 배려로 보인다.

 

네 번 째로 유다로 불리는 도마를 예수의 쌍둥이 형제로 보는 것은 도마행전뿐인데 그의 직업은 목수였다. 다시 말해 목수 아버지 요셉 밑에서 목수로 자랐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예수와의 관계성을 강조하려는 설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생을 노예로 팔았다는 비판이 생길 수 있다는 데까지는 미처 생각 못했다.

 

인도 교회는 정말 이렇게 노예로 팔려 갔던 도마가 세웠을까? 이장식의 책에서 소개되는 많은 서구 학자들의 주장에도 명쾌한 건 없고 추정만 있을 뿐이다. 나는 이런 주장들을 토대로 두 가지 가설을 내세우려고 한다.

 

첫번째로 영지주의자 바르 다이산이 선교사를 파송했을 가능성이다. 군다포르스가 왕으로 있었다는 나라(이장식은 펀잡제국이라고 부른다)는 파르티아 왕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으므로 파르티아가 몰락하던 225년경 전후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몰락 후 기독교가 더 번성했다는 사실은 의아하다.

 

그렇다면 이런 추정도 가능하다. 인도 사절단이 로마 황제를 만나러 로마로 가는 중에 에메사에서 당대 유명한 영지주의 학자였던 바르 다이산(Bar Daisan, 233년 사망)을 만났다(도마행전 이야기 (2) 참조). 바르 다이산이 도마행전의 저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증할만한 사료는 없지만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나는 바르 다이산이 도마 행전의 저자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는 사절단으로부터 인도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선교하려면 권위도 있어야 하지만 접근하기 용이한 ‘신학’의 유사성도 있어야 한다. 제자 도마 보다 예수의 쌍둥이 형제 도마가 더 권위가 있다. 저자는 형제와 제자를 하나의 인물로 설정했고, 질문이 많던 도마가 영지주의와도 잘 어울리며 인도 지역을 선교했다고 하기에도 적격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따라서 바르 다이산으로 추정되는 도마행전의 저자는 이미 펀잡제국의 몰락 소식을 들은 상태에서 인도 서남부 지역의 말라바르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송했을 가능성이 크다. 펀잡 지역은 북부 지역이었지만 “1세기경 도마가 가서 펀잡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미즈다이(Mizdai) 왕 통치시절 순교했고(도마행전 159장 이하), 박해를 피해 인도 서남부 해안인 말라바르까지 피신했다”는 이야기여야 아귀가 맞게 된다. 다시말해 3세기 인도 선교에 나섰던 이들은 정세가 불안한 북부지역보다는 서남부 해안을 택했으나 예수의 제자 중 하나가 직접 세운 사도 교회의 권위가 필요해 도마를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

 

말라바르 해안지역은 벵골만에 속한 지역으로 오늘날 쿼드(Quad- 미국 인도 일본 호주)의 대규모 훈련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도마 교회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바티칸 라디오 홈페이지에서 갈무리
시리아 말라바르 동방 가톨릭 교회 사제-바티칸 라디오 홈페이지에서 갈무리

 

인도 교회를 누가 세웠느냐는가에 대한 두번째 가설은 네스토리우스 설이다. 교황청의 소식을 전하는 바티칸 라디오(Vatican Radio)는 지난 2017년 10월 13일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도 소재 시리아-말라바르 교회에 새로운 두 개의 동방 가톨릭 교구를 설립하기로 하고 각각의 주교들을 임명했으며, 기존에 있던 두 교구의 관할권을 확장했다.”

 

동방 가톨릭이란 동방교회의 예전을 따르면서도 가톨릭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교단이다 .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의 우크라이나 동방 가톨릭교회도 마찬가지다. 바티칸 라디오는 시리아 말라바르 교회는 도마로부터 시작된 인도 교회의 전통에 속해 있다고 소개했다.

 

4세기 경 인도 말라바르 해안을 통해 출입이 잦던 페르시아인 무역 상인들이 도마 교회의 기원이 되었다는 게 유력한 설이다  유세비우스 교회사에는 도마가 페르시아 지역에 속한 파르티아까지 간 것으로 되어 있으니 말라가르 지역에서 도마의 위상을 강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3세기에 쓰여진 도마행전은 인도 교회의 도마 기원설을 확증하는데 적절한 증좌(證左)였다.  9세기 이후 페르시아 이라크 지역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몽골제국의 침략과 흑사병 등으로 크게 위축되면서 말라바르 교회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고 이때부터 도마 전통이 더욱 강조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9세기 이전의 도마 교회는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와 구별되지 않았고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당나라까지 가서 경교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즈음에 한반도에도 들어왔었다는 흔적을 남겼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