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1.13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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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강남의 한 대형교회를 갔다. 예배를 드리러 간 것이 아니었다. 내게 주소지를 허락한 친구에게 사인을 받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이나 사주고 오려는데 친구는 부득불 교회에서 식사를 하자고 했다. 친구에게는 큰 교회라는 사실이 대견하다. 그래서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이다. 식사대금이 사천 원인데 먹을 만 하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고집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친구가 이끄는 대로 그 교회에 가서 식사를 했다. 총각김치가 맛이 었었다. 식사 후 나오려는데 마침 그 교회의 3부 예배가 끝났다. 밀려나오는 사람들을 거슬러 지나갈 수가 없었다. 친구는 코로나가 끝나고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들을 보는데 그 사람들이 불쌍했다. 생명이 없는 사람들로 보였다. 성서에서 말하는 멸망의 대로를 그들은 걷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참 심각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나도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누가 옳은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정말 안티크리스천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는 내가 안티크리스천이 되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가 대형교회 교인들만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개신교는 물론 거의 모든 주류 그리스도교를 그렇게 생각한다.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생명이 없다. 물론 내가 말하는 생명이란 그리스도의 영을 말한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정말 내가 그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기쁨과 감사로 예배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몸 담은 교회나 그 교회의 목사나 함께 신앙생활 하는 교인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곳을 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현실을 충분히 이해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아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성인이거나 특별한 사람들로 구별하여 따로 잘 모셔두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무엇인가 자신이 동의하지 못하는 것을 요구하는 경우를 지나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임의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해도 좋은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일 수 있는가. 당연히 없어야 한다고 대답을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이다. 누구건 지나친 것을 요구하는 것은 혹세무민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는 상식적이거나 정상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으로 그들이 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가. 그 역시 생명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나는 하루아침에 지금의 내가 된 것이 아니다. 나는 한 교회의 목사였다. 크건 작건 한 교회의 목사가 된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 책임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나는 지금도 우리 교회를 다니다, 다른 교회들을 못나가게 된 교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나처럼 광야에 들어서지도 않았다. 그냥 세상 속에 방치되어있다. 그들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모른다. 그들은 내가 무언가를 이루면 합류할 마음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들 역시 내가 가는 길을 함께 갈 수는 없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들은 빛을 보았다. 그러나 빛을 보았다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래서 더 미안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강남에서 보았던 그 수많은 사람의 물결 속의 사람들과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된, 전에 우리 교회 교인이었던 사람들이 다르지 않다.

사실 나처럼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대다수가 이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다르다고 생각만 하고 있을 따름이다. 돈에 속수무책인 그들의 삶을 보면 그 사실이 드러난다. 다만 그들은 자신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따름이다.

어제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작은 아이가 시장에서 파는 통닭을 먹고 싶다고 해서 사러갔다. 현금으로 하면 천 원을 깎아준다. 그래서 오만 원짜리를 냈더니 그것을 집어넣는 통이 쓰레기통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돈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사장님을 존경해야겠네요.”라는 말을 했다. 내가 한 말의 의미를 다 알아듣지 못하는 사장님은 그냥 웃었다.

내가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생명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만일 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면 그들은 돈을 쓰레기처럼 여기면서 그 쓰레기를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돈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그러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그들은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굴러갈 수 없다. 굴러가지 않는다면 쓰러질 수밖에 없다. 결국 돈이 없으면 쓰러지는 교회가 된 것이다.

아직 코로나가 끝나지 않았지만 모임이 허락된 후 교회들은 앞 다투어 전도지를 돌리기에 여념이 없다. 도대체 전도지를 돌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선전하려고 그 일을 하면서 ‘영혼구원’이라는 거룩한 타이틀을 달았다. 기대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악순환이다. 우상이 된 교회와 그리스도인 아닌 그리스도인들의 분투!!

몇 달 전 한 교회에 설교를 하러갔다가 더 이상 제도권 교회에 가서 설교하지 않게 된 것은 특별히 그 교회가 잘못된 교회였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더 이상 제도권 교회에 가서 설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함으로써 그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졸지에 당황했던 그 교회의 목사에게는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광야에 들어선 나는, 내가 가는 길이, 길이 된다. 하지만 바람이 한 번 불면 지워지는 길일뿐이다. 그러나 뉘라서 이 길을 함께 가겠는가. 그래서 내가 가는 길은 엄위한 길이다. 자랑스러운 길이다. 하지만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과는 정말 대조적인 길이다. 나는 이 길이 바로 생명의 길이라고 확신한다.

이 길에서 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인정 따위는 애초에 바랄 수가 없는 길이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어떻게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이 내 입을 통해 당신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리고 그분이 임하셔서 다스리실 것임을 믿는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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