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기회
구원의 기회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5.26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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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기사를 보았다. 사랑하는 남녀의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펜팔로 사랑을 키워온 두 사람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군에 간 남자가 사고로 한 팔을 잃게 된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찾아온 여자 친구에게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여자 친구는 그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진 당신에게 내가 필요 없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부턴 내가 당신 곁에 있어야 해요.”

남자는 힘을 내서 하나 남은 왼팔로 재활에 전념했고, 열심히 일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정말 동화와 같은 해피엔딩이다.

여자 친구가 그녀의 아버지의 말대로 팔 없는 남자에게 딸을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행복할 수 있었을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더 행복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생에 다가오는 불행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그때도 상대방을 미련 없이 버리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또 다른 행복을 찾았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런 삶이 반복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한쪽 팔이 없어진 남자 친구에게 지금부턴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게 만들었던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한 “서로 사랑하라”는 그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 밥 먹여주느냐는 말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한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그 사랑을 상기시키고, 끌어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아닐까. 나는 또 다시 이렇게 직업의식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러나 나는 내게 있는 이런 직업의식을 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사랑은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기적인 인간들이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진정한 사랑에의 향수는 모든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새삼 섬머셋 모엄의 <달과 육 펜스>가 생각나는 건 항상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인간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돌아가야 할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있다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어제 자기 전 잠깐 본 티브이에서 한 프로를 보았다. “혓바닥 종합 격투기 세 치 혀”라는 프로다. 그곳에 나오는 사람들은 정말 말을 잘 한다. 한 아나운서에 이어 휠체어를 탄 장애인 한 사람이 나왔다. 그는 중간, 중간 눈물을 글썽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위 이야기의 여자 친구와 같은 동생이다. 척추가 마비되어 목 이하는 움직일 수 없었던 형을 돌봤다. 동생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형은 마침내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재활에 성공했다.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이 동생이었다고 말했다.

“장애란 우리 가족을 하나로 이어준 끈이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그리고 사랑은 상대방을 생명으로 풍성하게 한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다. “생명으로 풍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었고 그리스도인들 또한 그와 같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낯선 일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위기 앞에서 무감각하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위기는 곧 사랑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은 없다. 그들은 그것을 “약자 코스프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위 이야기의 여자 친구의 아버지와 같이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 친구의 아버지도 자신의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최소한 성서가 말하는 사랑,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약자 코스프레”를 하지 않기로 작정했지만 약자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코스프레란 있을 수 없다. 고통과 위기에 처한 사람이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그래서 늘 길을 두리번거리며 다닌다. 누군가 사인을 보내는 사람을 찾기 위함이다. 내 눈에는 그런 사람들이 보인다. 길바닥에서 잠을 자는 사람은 “약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처지 자체가 곧 “약자 코스프레”다. 그것을 보고도 무시하는 것은 보는 사람에게 사랑이 없는 것일 뿐이다.

물론 “약자 코스프레”로 먹고 사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힘든 목회자들이나 선교사들의 경우는 “약자 코스프레”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숙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그들은 그럴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

하지만 힘든 목회자들이나 선교사들이 아닌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삶은 그 자체로 “약자 코스프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기회”로 생각한다.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이보다 확실한 구원의 증거가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이 말씀이야말로 십자가 사건보다도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구원은 입으로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행위에 달려 있다.

양이나 염소로 구분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제 그런 일을 했는지, 혹은 안 했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이 사실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반사행동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위기와 고통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았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위기와 고통을 무의식적으로 외면하는 삶의 살았다. 무엇이 그들의 행위를 가르는가.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성서에서 말하는 그 사랑이다. 어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고, 어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했다. 이것이 구원을 판단하는 근거이고, 이것이 그 사람의 구원을 가른다.

“약자 코스프레”를 고의적으로 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위기 앞에서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외면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자신의 사랑의 유무와 진위를 가르고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두 이야기는 다행히 해피 엔딩이자 진행 중인 해피 이야기가 되었지만 장애란 모두를 불행 속으로 던지는 힘든 인생의 짐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장애와 같은 다른 이들의 고통과 위기를 구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자신이 행한 그 구원으로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짐을 지거나 지려할 때, 모두가 행복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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