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하나님 나라
폭력과 하나님 나라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3.05.29 02:5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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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의 별명이 ‘천방지축’이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아이가 되었다. 22개월이 아이의 사춘기라고 했다. 그러나 사춘기의 끝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아이는 점점 더 말을 안 듣는다.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하면 안 돼”라는 말을 듣고 알았다고 한 후에 돌아서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이다. 녀석은 그렇게 하는 것이 통쾌한지 하지 말라는 짓을 하고 낄낄거린다. 도무지 녀석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 녀석은 거실 티브이를 거칠게 흔들거나 세게 치는 것을 좋아한다. 벌써 수십 차례 그와 같은 행동이 반복되고, 그때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경고를 주었지만 녀석은 요지부동이다. 그래서 녀석이 티브이 앞으로 가면 녀석을 붙잡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늦는다. 아직 티브이가 고장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해주고, 하는 대로 내버려두면 아이가 ‘마귀’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다. 아이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우리는 실효가 없는 타이름을 계속해야 한다.

사실 내가 자라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손자의 행동은 어림없는 짓이다. 그렇게 했다가는 치도곤을 치른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아니 아주 일찍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게 했다가는 매를 맞는다. 그러나 우리는 손자를 때리지 않는다. 아이에게 우리에게 익숙한 “때치”라는 말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폭력이 없는 사랑이다.

사랑하면 폭력을 사용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녀석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떠한 폭력도 사용하지 않는다. 누구나 아이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계모가 아이를 학대하거나 친부모라도 아이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누구나 분노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닥치는 이러한 상황에서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 가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 내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가 손자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녀석을 모두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야단을 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누구도 녀석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우리 가족만의 특성이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 일에서 성공한다면 우리 손자는 평화주의자가 될 가능성 혹은 온전한 평화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는 어느 정도 폭력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고, 커서는 군대에도 갔다 왔다. 그래서 내가 평화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매사에 주의하려 하지만 내게 이미 내면화되어있는 폭력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제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 말뿐인 평화주의자로 어정쩡한 삶을 살고 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마을에 대해 제자들이 한 말이다. 제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폭력을 행사하자는 것이다. 폭력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폭력으로 관철하는 것에는 어떤 한계가 존재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한계란 완벽한 상태에 모자란다는 것을 의미하지 효과가 없다거나 결과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렇게 폭력을 통한 차선책에 점차로 익숙해진다. “사랑의 매”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이 없는 세상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불을 내려 본때를 보여주자는 제자들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우리는 쉽게 폭력을 단념할 수 없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복음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폭력의 단념이라는 불가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 폭력 때문에 우리는 주인을 정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신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여기서 구약의 사건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폭력을 거론할 생각을 멈추라. 그것은 조금 다른 주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직결 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폭력의 단념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사랑의 매”도 허락하지 않는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 제목이 생각난다. 책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폭력적이다. 세상은 폭력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다다. 고통도 결핍도 인간에게는 폭력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돈은 그렇게 폭력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대한 즉각적인 처방을 제공한다. 그 방식은 당연히 힘을 기반으로 하는 또 다른 폭력이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실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이 재물을 선택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맘몬을 주인으로 택하게 되는 이유는 맘몬이 폭력적으로 다가와 폭력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으로 다가오셔서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신다. 얼핏 보면 너무도 좋아 보이지만 폭력이 없는 하나님 나라는 실제로 구현되기가 어렵다. 사랑이 좋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처음에 예로 든 손자의 문제처럼 현실 앞에서 무력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폭력을 단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극단적인 상황을 예로 들며 폭력을 단념할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가장 흔한 예가 강도가 든 경우나 아내나 딸을 누군가 강간 하려 할 때도 폭력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어려운 일이다. 모순이란 이럴 때 사용되어야 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분명한 답은 폭력의 단념 외에는 없다. 결국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폭력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전지전능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밖에 없다. 그때도 내가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될지,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폭력을 단념해야 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만히 있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을 요구하시고, 우리가 거기에 순종할 때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시작된다. 아브라함의 ‘아케다 사건’은 그 순종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맘몬을 주인으로 섬기게 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사실과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폭력을 단념할 때 사실이 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폭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완전히 다른 나라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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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두기 2023-05-31 14:58:22
일리있는 말씀입니다만 성경에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구절이 버젓이 있는데도 그걸 설명 안하고 사랑의 매도 안된다고만 하니 설득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잠언 말씀은 가볍게 넘어가도 되는 말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