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기독교
검찰 기독교
  • 지성수 목사
  • 승인 2023.10.04 07: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교의 화폐단위는 업(카르마)이다. 현세에서 업이라는 통장의 잔고에 업을 쌓거나 업을 지워야 하는 것이다. 살면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나의 업이고 업에서 벗어나는 길은 부처에게 귀의 하는 것 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이 땅의 업을 한 방에 청산해주었기 때문에 인간은 예수 앞에서 모두 신용불량자이다. 그래서 교회의 예배 순서에는 현금출납기처럼 ‘참회의 기도’, ‘사죄의 확인’ 등 죄출납장치가 있다.

누구나 ‘죄인’으로 시작하는 또 다른 곳이 있는데 검찰이다. 다른 것은 검찰은 “네가 죄인이다”로 시작하는 것에 비하여 교회는 “내가 죄인이다”로 시작한다. 그런데 검찰에서는 ‘죄인’이라면 기분이 나쁜데 기독교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며 기분 좋아한다.

그것은 자체 변호 시스템에 의해서 무슨 죄든 용서 받기 때문이다.

옷이 더러운 사람은 세탁소를 가야지 어쩌겠는가? 그러므로 세탁소를 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면 안된다. 문제는 손빨래를 하는 사람도 있고 유투브에서 보는 티벳 사람들처럼 옷을 빨지 않고 입는 사람들도 입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은 뭐니 뭐니 해도 ‘의미’로 따져 볼 때, 인류사의 수많은 사건 중에 가장 큰 ‘의미심장한’ 사건이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이 사건이 주류 기독교에 의하여 독과점 해석이 된 것이 ‘대속론(代贖論)’이다. 유목민 출신인 유대인들은 양을 잡아 죄사함을 받는다는 생각이 전통적으로 있었다. 유대인이었던 바울에게는 속죄론이 해결(解決)되어야 할 긴박한 주제였지만 ‘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대신 죽었다’는 것은 한국인의 정서에 쉽게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대속론(代贖論)"을 더 이상 나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대속론을 통해서 자기를 정화해갔던 수천, 수억의 사람들의 믿음에 대하여 정말로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십자가 사건을 예수의 삶에서 똑떼기해서 대속론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인류구원을 위한 예수의 삶 전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클라이막스라고 보이야 한다.

나는 지금도 예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나 자신을 정화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벽에 붙여 놓은 부적처럼 십자가의 신비한 효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삶으로 체험하려고 하는 것이다.

호주에 살 때 영어를 많이 고생 시켰다. 예수가 한국 교회에 와서 고생 많이 한다.

어렸을 적 학교 앞에 리어카에서 불량식품을 파는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다. 상한 목사들이 파는 불량식품 때문에 기독이 개독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건강한 식품을 취급하는 멀쩡한 목사들이 많다. 그들은 멀쩡할 뿐만 아니라 귀한 존재들이다. 나는 그들과 더불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힘을 모으고 있다.

이 세상에서 2중 국적은 얻기 어렵지만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2중 국적은 얻기 쉽다.

목사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죽어서 받는 것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살아 있을 때 받는다는 것이 예수의 입국 안내였다. 예수는 2000년 전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깨우치다가 타살 당했다. 그런데 그의 이름으로 영업을 하는 기독교는 계속해서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가짜뉴스를 전파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