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인가, 공동체인가.
개인인가, 공동체인가.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3.12.29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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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요일 4:7).

사람은 집단을 더 추구하거나 개인을 더 추구한다. 집단의 기준에 개인을 맞추려 하거나, 개인의 기준에 알맞은 집단을 형성하려고 하는 두 상반된 경향의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오롯이 집단으로만 존재하거나 개인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이성적, 정서적으로 이끌리는 축을 따라 현실만큼만 움직인다. 집단으로서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은 개인으로서 불안을 경험하고, 역으로 개인으로서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집단으로서 박탈을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론을 다룰 때도 인간의 이 상반된 두 가지 경향을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 특히 개인의 자유가 문화의 가치 체계로 깊이 스며 든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이 그렇다.

 예수가 설파한 하나님 나라(Basileia)는 그 단어 자체에 국가 공동체의 이미지가 전제되어 있다. 고대 사회의 왕정 체제는 최고 통치자를 기점으로 한 하나의 통합된 유기체였다. 플라톤은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보다는 국가 안에서 개인들이 절제함으로써 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정의를 이루는 길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국가가 올바른 것은 그 안의 타고난 세 계급이 저마다 제 할 일을 하기 때문이며, 국가가 절제 있고 용감하고 지혜로운 까닭은 이들 세 계급의 심적 상태와 습관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데 합의했네”(『국가』, 제4권, 235a). 

그러니까 고대 사회의 가치 체계 안에서 집단과 개인의 관계는 서로 관련했지만, 두 가치가 대립했을 경우 언제나 집단이 개인보다 우월한 가치를 선점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비록 이 땅의 교회를 가리켜 광의의 단어인 바실레이아(Basileia)보다는 에클레시아(ecclesia)를 사용했지만, 이 단어마저 정치 활동의 맥락에서 여전히 공동체적이었다. 신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개인의 실존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분명히 담고 있다(눅 19:10; 요 4:14; 11:5; 행 3:6; 딤후 1:2). 하지만 신약의 저자들은 개인주의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이 성경의 독자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성경에 기반한 교회론을 확립할 때 공동체적 관점뿐만 아니라, 개인의 관점에서도 유효한 교회의 의미와 실천을 담아 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이 보여 주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교(Koinonia)로서 교회 공동체는 오늘날 안타깝게도 그 의미가 퇴색되었기 때문이다.

집단주의 문화의 폭력을 경험한 현대인들에게 공동체는 더 이상 안식처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집단의 가치를 우선시함으로써 개인을 소외시키는 공동체의 현실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근래 들어 우리 주변에서 ‘공동체’라는 규정적이고 배타성을 띈 단어보다 ‘연대’라는 기능적이고 이타성을 띈 단어가 줄곧 사용되곤 한다. 나는 아무리 개인화되고 있는 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일지라도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기능하는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의 김동노 교수는 『사회이론』(2023년 봄/여름)에서 「개인주의, 집단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와 한국 사회의 변화」라는 글을 기재했다. 그는 한국 사회는 서구 사회와 달리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결합되지 못했고, 집단주의 안에 공동체주의의 특성이 자리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본래 자유주의에 기반한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과 같은 보편의 가치를 우선시하며, 이를 충족한 개인들이 모여 공동체를 추구한다. 마치 『데미안』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싱클레어, 에바부인, 데미안이 이룬 공동체의 모습과 같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혼용하여 그 개념을 왜곡하곤 한다. 자유주의에 기반한 개인주의는 공동체의 보편 가치와 개인의 보편 가치가 충돌할 경우 개인을 선택하는 지향을 지닐 뿐, 공동체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 반면 공동체주의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할 가치를 설정하고 개인은 확보된 도덕성 안에서 그 가치에 헌신함으로써 공동체에 통합된다.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보편 가치 실현보다 공동체의 보편 가치 실현을 우선시한다. 김동노 교수는 이 두 사상의 근본적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공동체주의는 개인주의가 개인들 사이의 갈등을 적절히 인식하지 못하고, 개인주의 가치의 추구가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개인주의에서 강조하는 개인의 자유가 형식적 자유에 머무를 위험성이 있음을 비판했다. 역으로 개인주의는 공동체주의가 전체주의적 사회를 가져올 가능성, 공동체 내 개인들 사이의 위계성과 획일성을 조장할 위험성, 공동체 안팎을 차별화하는 사회적 배타성의 문제 등을 지적했다”(「개인주의, 집단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와 한국 사회의 변화」, 『사회이론』). 

그는 끝으로 두 사상이 서로를 배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개인주의의 가치와,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책임과 개인을 보호하는 공동체주의의 가치가 사회 안에서 조화롭게 구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시도를 가리켜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 또는 ‘공동체주의적 자유주의’라고 칭하며 혼란하고 분열한 사회에 이러한 중용의 대안을 제안한다.

 신약성경은 자유와 공동체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하나의 독특한 원리를 제안한다. 그것은 ‘하나님’, 동의어로 ‘사랑’이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8)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랑을 존재론적으로 일치시킨다. 또한 자유는 사랑의 필수 조건이다.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십시오”(갈 5:13). 자유만이 사랑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다. 자유가 박탈당한 채 행하는 사랑은 결코 사랑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만이 하나님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유와 공동체의 조화를 사랑으로 이루고 계신 분이다. 세 위격의 하나님은 독립적이면서 자유로이 서로에게 참여하신다. 위르겐 몰트만은 자유와 사랑의 관계를 삼위일체적 언어로 표현한다.

 

“자유의 진리는 결코 소유물에 대한 힘이나 지배가 아니다.… 자유는 사랑을 통하여 그의 신적인 자유에 이른다. 사랑은 자명하고 의문이 없으며 따라서 ‘선하심의 넘침’이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간극과 갈등은 한국 교회 안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와 사랑에 대한 뜻을 헤아리지 않은 채 개인과 공동체의 간극을 좁히려는 시도는 과연 가능할까. 기독교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 사랑이 자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 하나님이 자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인간은 인간 본성의 독특한 구조와 한계에 따라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기 원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웃 인간들과 자유롭게 함께하기를 원하신다. 인간성의 위대함 혹은 비참함 안에서, 약속 혹은 근심 안에서, 부유함 혹은 가난함 안에서 서로 함께하기를 원하신다.”『하나님의 인간성』, 자유의 선물, 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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