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트머리
끄트머리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4.01.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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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많은 백성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요한복음 8:1-12

 

끄트머리에서 이 글을 쓴다. 점심에 소복하게 눈이 내린 동네를 걸었다. 줄줄이 이어진 식당 창문 안쪽으로 사람들의 무리가 보인다. 애지중지 열두 달을 함께 보낸 가족이거나 직장 동료인 듯하다. 수많은 얼굴 모두가 사뭇 진지하다. 끄트머리는 언제나 여러 감정의 도가니다. 지나간 것들에 대한 적확한 회고와 함께 아직 오지 않은 것들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가 뒤섞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가 아주 살짝 겹쳐 있는 순간, 그것이 끄트머리다. 그래서 끄트머리의 다른 뜻이 일의 실마리인 것이다. 끝이면서 시작인 점, 끄트머리. 시간이란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매순간은 끄트머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시작의 의미가 삭제된 끄트머리, 곧 종말만을 마주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미래를 빼앗긴 사람들이다. 며칠 전, 어느 배우가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의 끄트머리를 빼앗은 가혹한 인간과 사회에 오한이 밀려 온다.

 

이른 아침, 예수는 성전에 올라갔다. 사람들은 그의 주위에 모였고 여느 때처럼 편히 앉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가 있는 곳으로 들이닥쳤다. 한 여자를 데리고 왔다. 그녀는 당시 문화 속에서 부정한 성적 관계를 유지하다가 남성들에 의해 현장에서 붙잡힌 것으로 묘사된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여자를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앞세워 예수에게 묻는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성전에 모인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예수에게 집중되었다. 그가 이 주제에 관해서 무슨 답변을 내놓을지, 혹시 그가 당황하거나 얼버무리지는 않을지, 궁금했을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덫에 예수가 분명히 걸려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원래부터 자신들의 종교와 사회 체계에 관해 다른 말을 하는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덫을 만들어 예수의 영향력을 잠재울 계획을 세웠다. 그들의 묘책은 규범과 인권의 딜레마 안에 예수를 가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목적을 실현하는 데 이용할 만한 대상을 둘러보았고, 간음한 여자를 붙잡게 된 것이다. 그 여자는 사회의 규범을 어겼기 때문에, 그러니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활용 가능한 호모 사케르homo sacar다. 호모 사케르는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 없는 생명’을 뜻한다. 호모 사케르는 살해해도 그 죄의 책임을 가해자에게 묻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줄곧 노예가 된다. 그들은 저항할 수 없다. 여하튼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들의 잘못은 빌미가 되어 힘 있는 자들의 도구가 된다. 힘 있는 자들은 호모 사케르의 끄트머리를 빼앗는다. 미래의 박탈이며, 가능성의 박탈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현하는 데 알맞은 호모 사케르인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예수를 찾아왔다. 종교지도자들과 예수의 대화에서 간음한 여자는 한가운데 있지만 아무 말이 없다. 종교지도자들은 상기된 채 예수를 둘러쌌고, 예수는 원래 자리에 그대로 앉아 하던 일을 지속한다. 무미건조한 예수의 반응에 화가 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다그쳤다. 그제야 예수는 몸을 일으켜 입을 연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시간이 꽤 흐르면서 광분해 있던 이들이 하나씩 자리를 이탈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는 말에,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먼저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했음을 성경은 보여 준다. 그들은 예수의 말에 단순히 죄책감만을 느낀 것이 아니다. 이미 돌을 던지려고 작정한 채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간음한 여자에게서 자신을 마주한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그림자를 여자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들통나지 않았을 뿐 자신에게도 있는 그것, 또는 들통난 적 있지만 용서를 받았던 그것을 본 것이다. 모두가 떠났다. 그제야 예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곳에 남은 두 사람, 예수와 간음한여자. 예수는 끝까지 여자의 존엄을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여자가 입을 연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는 여자가 빼앗긴 끄트머리를 다시 건네 주었다. 과거와 미래가 아주 살짝 겹쳐 있는 순간, 끝이면서 시작인 점. 빼앗겼던 그녀의 존엄과 미래가 다시 회복된 것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서 기독교는 완전한 인간상을 그리지 않는다. 예수는 완전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거짓과 무자비를 질타했다. 실현할 수 없는 완전을 추구하는 거짓된 인간과 사회는 줄곧 미래와 가능성을 박탈한다. 결국 남는 것은 한 인생을 과거에 묶어 버리는 정죄뿐이다.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 아닌, 회복하는 인간을 아름다운 인간의 모형으로 여겼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회개, 용서, 회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끄트머리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새로운 일의 실마리가 일어나는 것이 구원이다. 이 사회에도 구원이 임해야 한다. 회개할 수 있는 사회, 용서할 수 있는 사회, 회복하는 사회를 꿈꾼다.

최병인 편집장 / 뜰힘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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