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아래서
한계 아래서
  • 최병인 편집장
  • 승인 2024.04.08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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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예레미야 5:22).

한계를 마주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통과하는 문은 좌절이다. 한계가 좌절로 들어서는 입구라면, 좌절의 출구에는 자유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시공간의 순서로 묘사하다 보니 이 세 가지의 경계가 또렷한 듯하지만, 사실 ‘한계, 좌절, 자유’의 경계는 수채화로 채색된 듯 교차된 영역이 흐릿하다.

만약 우리가 겪는 이 세 실존의 경계가 굵은 선으로 그어져 있다면, 우리는 미리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갑작스럽게 내몰린다. 일상을 살다가 갑작스러운 한계를 마주한 우리는 갑작스럽게 좌절하여 끝도 없이 추락하다가 갑작스러운 상승, 곧 자유로 나아간다.

나는 이러한 경험들을 줄곧 하면서 한계라는 것이 마치 인간에게 의도되어 있고 계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한계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매번 새롭게 나를 위기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한계가 언제나 나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계는 무엇이길래 우리를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한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막연한 모험 의지를 무참히 꺾어 버리기 때문이다. 한계는 도무지 넘어설 수 없는 높은 장벽과 같다. 한계를 끝없이 넘어서려는 인간은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한 채 공중을 부유할 따름이다.

한계를 마주하기 전까지 인간은 땅에서 일어나는 실제 이야기들에 참여하지 못한 채, 하늘 위에서 땅을 내려다보며 위태로운 곡예를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계를 마주한다는 것은 착륙하는 행위다. 여기서 오해가 발생해선 안 된다. 한계를 인정하는 일을 불의한 억압을 받아들이는 일과 동일시해선 안 된다.

한계는 각자가 판단해야 할 끝자락이다. 누군가 대신 규정한 한계를 나의 한계로 받아들이는 것은 억압이다. 억압에는 한계의 목적인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 성경에는 한계와 좌절을 통과함으로써 자유를 얻은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야곱, 욥, 삭개오, 바울과 같은 인물들은 자신이 처한 한계를 하나님에게 가지고 감으로써 비로소 그 문제를 끌어안게 되었고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한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나의 이야기가 있는 땅으로 착륙하는 행위다.

 

현대 사회는 비록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한계를 받아들이는 행위를 실상 실패로 여긴다. “나의 한계는 여기까지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일하기를 꺼려 한다. 그를 독려하는 것을 시간의 낭비로 여긴다. 무한대의 동력을 가진 동료를 원하고, 스스로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하지만 유한한 존재 안에 무한한 힘은 본래 자리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일같이 한계의 장벽을 뛰어넘으려고 카페인의 열기로 몸을 달구며 삶을 살아간다. 피로함이 명예가 되어 버린 사회는 어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아침 7시에 등교하여 자정이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스터디 카페 밖을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에게도 공부는 카페인 곁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 되었다.

교회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 사회 공동체가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끝이 없는 달리기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주위를 둘러볼 수도 없는 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어느 날, 한 아이에게 연락이 왔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학교를 갈 힘이 도저히 나질 않아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단다. 번아웃이다. 마지막 심지까지 타 버려야 멈출 수 있는 사회다. 아이들에게도 공부는 한계가 정해져 있지 않은 노동이 된 것이다.

 

조나단 말레식은 자신의 저서인 ⟪번아웃의 종말⟫에서 현대인의 노동 환경을 이렇게 비판한다. “오늘날의 노동 이데올로기에서는 당신의 성취가 아니라, 다음번 성취를 향한 끝없는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끝이 없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실제로 한계가 없는 사회를 벅차게 따라 가고 있는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아이들도 어른들에게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다. 끝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한계를 예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얻게 된 현재의 성공은 기쁨보다 두려움을 준다. 현재의 성취가 다음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인간의 존엄을 구한다는 사실을 고대인들은 알았다. 얼마 전, 교회 아이들과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시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읽었다. 하늘의 신탁을 받은 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돌파하기 위해 의지를 불사르다 끝내 비극의 창살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야기다. 이 비극은 인류에게 큰 사랑을 받아 왔다. 우리는 비극을 왜 읽는 것일까. 사람들은 어째서 좋은 결말이 아닌, 답답한 결말에 더 깊은 공감을 하는 것일까. 비극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단순히 인간의 외침을 묵살하지 않는다. 도리어 인간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린다. 운명을 거슬러 주체적인 삶을 쟁취하려고 한 오이디푸스, 그의 불타던 의지는 전부 소멸되고, 끝내 그는 흑암에 놓인다. 여기서 독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비극의 절정에서 고요함과 잔잔함이 흘러나온다. 마치 방금 폭풍우가 지나가 버린 정적의 바다 가운데 놓인 듯한 감각을 느낀다.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대사다. “만사에 지배자가 되겠다는 생각일랑 버리십시오. 그대가 지배했던 것조차도 평생 동안 그대를 따르지 않습니다.” 

 

비극은 다른 말로 한계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한계를 은폐하거나 부정한다. 하지만 우리 삶은 한계 아래 놓여 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비극과 한계는 다양하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 둘러싸여 있다. 온전하지 않았던 가정 환경, 극복할 수 없는 몸의 건강, 계발할 수 없었던 능력, 나를 붙들고 있는 과거처럼 도무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쉽사리 극복할 수 없는 한계들이 모두 우리의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들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파편화되고 소외된 개인들을 긍휼히 여기신다. 성경은 한계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줄곧 묘사한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은 성전 제사에 있어서도 경계를 통해 거룩의 깊이감을 나타내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소 바깥뜰에서, 제사장은 성소에서, 대제사장은 지성소에서 제사에 참여했다. 경계선은 존재를 의식하게 한다. 한계 지점을 경험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자각하게 한다. 무한자 앞에 선다는 것은 바로 유한자인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다. 비로소 그때 우리는 자유를 경험한다.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한 모세는 자신을 자각하게 되어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끝내 모세의 얼굴 살결이 찬란히 빛나게 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출 34:30).

 

한계를 은폐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담대히 한계를 선포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가 가진 한계를 직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한계를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선 큰 성과를 보지 못할 것이다. 개인은 한계를 감당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계를 마주했을 때 개인에게 들어차는 수치감과 모멸감을 함께 버텨 줄 공동체가 필요하다. 더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며, 나와 너의 한계 상황을 진심으로 공감해 주고 격려해 주며, 모두의 한계를 끌어안는 공동체가 있다면 우리는 자유할 수 있을 것이다. 성동혁 시인의 산문집 ⟪뉘앙스⟫에는 친구의 한계를 함께 감당해 주는 공동체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어김없이 교회를 떠올린다.

 

함께, 오를 수 있는 만큼 

오래 전, 친구에게 한 번도 산에 올라가 보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맘이 이상하게 슬퍼진다는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오래 간직했다. 시간이 지나 그 친구는 의료인이 되었고, 어느 날 조심스럽게 산에 오르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친구에게 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날, 친구는 곧바로 나를 업고 산에 오르고 싶었다고 했다.

꼼꼼하게 준비를 하여 2016년 시월, 태어나 처음으로 산을 올랐다. 정확히는 친구들에게 업혀 산을 느꼈다. 친구들이 발을 디딜 때마다 그들의 등을 통해 산을 느꼈다. 산소통을 드는 친구, 미리 앞으로 가며 길을 점검하는 친구, 번갈아가며 지게로 나를 업은 친구들, 뒤에서 받쳐 주는 친구, 그 표정을 담아 주던 사진가 친구.

산을 오르기 전 우리의 목표는 정상이 아니었다. 우린 ‘함께’, 우리가 ‘오를 수 있는 만큼’만 오르자 했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한 정상이었다.

많은 불가능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행운처럼 친구들을 만나 많은 풍경을 보았다. 시간이 흘러 친구들은 직업을 갖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각자의 호칭에 걸맞은 삶을 사느라 예전만큼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내게 그들의 위치는 언제나 '옆집'이다. 

나의 삶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님을 누누이 이야기한다.

최병인 편집장 / 뜰힘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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