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야, 네 남편 머리를 내려쳐라"
"며느리야, 네 남편 머리를 내려쳐라"
  • 유영
  • 승인 2016.06.14 0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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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범죄로 연일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진다. 얼마 지나지 않은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이 벌써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새로운 혐오범죄 소식이 이어진다. 

여성 살해, 폭행 사건은 말할 것도 없다. 지난 11일 열린 퀴어축제에서 일부 기독교인들이 반대 집회에서 보여준 혐오 집회는 사랑과 차별을 동일하게 둔 종교인의 무지에 경악했다. 거기에 미국 플로리다에서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자행된 총기 난사 사건까지, 무수한 혐오범죄 피해자를 지켜보며 애도하기 힘들 만큼 사건이 계속됐다. 

존재하는 혐오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만연하다. 혐오범죄를 혐오범죄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목소리가 너무 높다. 인정하지 않으니, 가장 기본적 사안인 혐오를 막을 법조차 재정할 수 없다.

법은 혐오를 막을 수 없지만, 혐오가 범죄라는 사실은 알게 한다. 혐오로 가득찬 미국 사회를 보면 필요를 알 수 있다. 차별과 혐오가 강하게 존재하지만, 차별과 혐오가 범죄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혐오와 싸우려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래야 살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배웠다. 우리 시대 어머니들은 여성 혐오의 피해자들이다. 차별의 대상이었고, 억압받았던 존재였다. 어머니는 그런 시각과 싸웠다.   

안타까운 사건들이 이어지고, 혐오와 싸우지 못하게 하는 목소리를 접하면서 어머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아들과 결혼할 여성에게 가장 먼저 충고한 일화가 여러가지를 시사해 주었다. - 기자 주

어머니가 예비 며느리 손을 잡았다. 미소를 지으며 '노총각 아들을 구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두 여성이 처음 만난 날, 첫 장면은 화기애애했다. 아버지도 며느리를 맞는다는 사실이 신기한 듯 웃음만 보였다. 환갑을 맞은 날, 아들이 큰 선물을 했다며 새 식구를 맞이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따라다녔던 40년 전 이야기부터 두 아들이 말썽을 심하게 부려 고통스러웠던 육아 경험담까지 과거사도 샘솟듯 터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예비 며느리는 어머니가 신혼 시절 경험한 밥상 사건을 최고의 이야기로 꼽았다. 

부모님은 1978년 2월에 결혼했다. 신혼 생활은 부엌과 화장실을 공용으로 사용하는 반지하 단칸방 월세로 시작했다. 다들 힘겹게 살던 시기였기에 그마저도 감사했다. 하지만, 행복할 줄 알았던 신혼부부의 관계 문제는 밥상에서 일어났다. 한 주 만에 아버지가 반찬 투정을 하면서 밥상을 뒤엎는 폭력 때문이었다. 

"전라도 출신 남편 입맛에 충청도 출신 아내 반찬이 맞지 않았던 게지. 그 정도 투정에서 멈췄으면 신혼부부의 추억담으로 남았을 텐데, 이 사람이 밥상을 엎어 버렸어. 소리까지 지르니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더라. 싸움이 격해지니, 결국 손이 올라오려고 했어."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었기에 충격이 컸다. 앞으로 폭력적 사건이 계속되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다. 이대로 당하고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순간, 신랑이 아끼는 기타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기타를 들고 남편이 엎은 밥상으로 갔다. 기타를 그 위에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나한테 다시 한 번 손대봐. 네가 잘 때 머리를 이렇게 부숴버릴 테니까."

아버지는 그 뒤로 밥상을 엎은 적이 없다. 물론 청소와 설거지하는 남편이 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경험이 있는 어머니가 예비 며느리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웃음기 사라진 표정으로 충고했다.

"내 아들은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지만, 혹시라도 내 기대랑 다르면 가만히 있지 마. 그때는 남편이 아니라 원수로 생각하고 머리를 내려쳐."

아버지는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무어라 말씀하고 싶어 보였는데, 이내 의자에 기대며 몸을 물렸다. 나는 아내를 집에 배웅해 주면서 약속했다. 물리적 폭력만 아니라 폭력적 분위기도 만들지 않겠다고. 아내는 웃으며 "어머님 아들이니 믿는다"고 격려했다. 

하지만 '연상을 내세우며 나이로 억누르려고 하면 어쩌지. 스스로 가장이라는 권위를 부여해 아내를 하대하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에 치졸한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도 남자라는 인식이 강했던 탓이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는 남편이 되겠다고 다시 다짐하고 약속했다. 

결혼한 지 4년이 지났다. 아내는 아직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이정도 평가도 제도를 만들어 활용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 부부는 가급적 무엇이든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정한다. 회의 시간을 정해 조금 딱딱해도 안건을 정해 토론한다. 지금은 그렇게 못하지만, 신혼 초에는 회의록을 만들어 적기도 했다. 생활하는 영역에서 할 일들은 적성에 맞게 분담했다. 요리는 내가 하고, 아내는 설거지를 한다. 청소와 빨래는 업무를 나눴다. 

어떤 장치를 마련해도 아내가 어머니처럼 가부장제에 대항하다 늙어가지 않을까 아직도 두렵다. 남자라서 경험하지 못했고, 생각해 보지 못한 차별과 권력관계가, 사회와 내 무의식에 여전한 까닭이다. 조금만 걱정을 멈추면 나도 우리 세대 아버지들처럼 아내를 힘들게 하면서 좋은 남편이라 주장할지 모른다. 나처럼 잘해주는 남편이 있어서 우리나라가 여성상위 시대를 맞았다고 푸념하며, 남녀가 평등한 세상은 언제 오는지 걱정하면서 말이다. 

여전히 부족한 게 많아서 언제든 아내에게 머리가 박살날 수 있는 남편으로 살아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그래야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살아갈 테니.

나는 어머니를 보면서 한국 사회에 여성 혐오가 얼마나 만연한지 알았다. 내 안에 있는 여성 혐오를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 세대 어머니들 같은 피해자는 내 아내, 내 딸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뉴욕을 함께 여행한 아내(왼쪽)와 어머니(오른쪽)가 한 컷에 담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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