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종교성을 발견한 단 한 명의 인물
니체의 종교성을 발견한 단 한 명의 인물
  • 김기대
  • 승인 2022.07.07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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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자녀열전- 니체를 울게 만든 루 살로메

‘신은 죽었다’는 선언에서부터 그의 책‘안티 크리스트’까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니체는 분명 문제적 인물이다. 그가 투철한 반기독교 정서를 가진 것은 맞지만 그에게는 목사였던 아버지의 그림자가 평생토록 짙게 드리워져 있다. 니체 나이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신에 대한 반감으로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무신론자야 말로 가장 충실한 유신론자라고 말했던 지젝의 말처럼 어쩌면 니체는 가장 유신론적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말이 언어의 유희같다고 느껴진다면 ‘신’대신 ‘빨갱이’를 대입하면 명확하게 와 닿는다. 한국사회에서 반공주의자들이야 말로 빨갱이를 고무찬양하는 용공주의자들이다. 빨갱이는 남한 사회의 모든 모순에 개입할 정도로 용의 주도하며, 세계 10위 권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진보) 대통령들이 남한을 통째로 갖다 바쳐야 할 만큼 경배 받기에 충분한 존재로 극우세력이 오히려 북한을 찬양한다.

다시 니체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아버지를 다섯 살에 여읜 니체는 신을 원망하면서도 신의 모습을 투사시켰던 아버지에게서 평생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아버지의 사인은 뇌연화증이었는데 니체를 평생 괴롭혔던 두통과 말년의 정신병도 유전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유럽에서도 흔치 않은 성씨인 'Nietzsche' 'Nikolaus(산타 클로스의 그 니콜라우스다)' 슬라브식 표현이라고 한다.  니체는 조상이 폴란드에서 이주했을 것이라고 늘상 말해 왔는데 니체 사후 연구에 따르면 토종 독일인임이 밝혀 졌다.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 목사는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가 전문가 수준이었다. 어린 기억 속 아버지의 연주는 마치 천상의 소리로 어린 니체에게 각인되었다. 장남이었던 니체는 밑으로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하나를 두었는데 아버지의 사망 후 동생 마저 두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니체의 기억 속 아버지는 이렇다.

당시에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교회에서 오르간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은 마치 장례식에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왜 그런가 하고 살펴 보는데 갑자기 무덤 하나가 솟아오르고, 그 속에서 상복을 입은 아버지가 나왔다. 그는 급히 교회로 가더니 조금 후에 어린 아이를 안고 나왔다. 무덤이 열리자 그는 안으로 들어가고 뚜껑은 다시 다뎠다. 시끄럽던 오르간 소리가 갑자기 멈추고 나는 잠에서 깼다. 다음날 어린 요제프가 갑자기 병이 나 경련을 일으키더니 몇 시간 후에 죽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펐다. 꿈이 완전히 현실이 된 것이다. (1858년)

얼마전 세상을 떠난 시인 김지하도 비슷한 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가 아홉살 때 온 세상이 불바다로 변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며칠 후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니체와 김지하 두 사람 모두 비범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다섯 살과 아홉살이 꿈꾼 기억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선후관계는 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말해 동생이 죽고 난 후, 전쟁이 발발한 후 그런 꿈을 꾸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은 니체의 아버지를 데려 갔고 아버지는 동생을 데려갔다는 생각이 니체의 어릴 적 사고를 지배했을 것이다.

동생 엘리자베트의 회고에 따르면 1851년 니체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 친구들은 그를 ‘꼬마 목사’로 불렀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동생의 기억도 신뢰할 만한 것은 못되지만 니체가 성경구절이나 찬송가 가사를 인용해서 말할 때는 친구들이 감동을 받아 눈물을 보일 정도였다는 회고도 있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를 열망했고, 그럴 만한 능력도 있다고 믿었다. 니체는 열심히 공부해서 신학 과목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신앙심이 깊었던 열두 살의 니체는 모든 영광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에게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니체가 12살 때 상급생은 니체를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12살 예수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 또한 동생의 회고다.

“나의 교육은 내가 대부분 알아서 해야만 했다. (…)지성을 갖춘 남자의 지도가 나에게는 없었다.” 마초적 취향의 니체는 사춘기에 접어 들면서 아버지의 부재를 더욱 안타까워 했다. 그는 10대 후반 어머니를 떠나면서 교회와 결별하고 본격적으로 그의 철학적(처음에는 문헌학으로 시작했다) 작업을 시작했고 박사학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젤대학 교수가 될만큼 뛰어난 학문적 자질을 보였다.

두 번째 아버지로 여길 만큼 존경하고 따르던 음악가 바그너가 음악회에서 니체를 외면하자 바그너와의 결별을 준비한다. 게다가 그가 연정을 품고 있던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 조차도 니체를 무시했다. 니체로서는 세 명의 아버지(신, 생부, 바그너)를 잃었고 세 명의 여인(어머니, 코지마, 갑작스레 구혼했다가 거절당한 마틸데 트람페다흐라는 여인)에게도 상처를 입었다.

이 때 17살 연하의 여인이 니체 앞에 운명처럼 등장한다. 나이 38세의 바젤 교수 앞에 나타난 스위스 취리히 대학(당시 드물게 여학생을 받아 주던 대학이었다) 휴학생인 러시아 출신의 루 살로메에게 니체는 빠져들었다. 니체의 친구 파울 레가 살로메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도무지 ‘감당’이 안되던 터라 그에게 급히 로마로 오라고 연락을 취했다.

니체를 살로메에게 소개한 파울 레와 니체, 그리고 살로메.  세 사람은 마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남성 두 사람은 서있고, 살로메는 채찍을 들고 앉아 있다. 남성이 마차를 끄는 말이라는 설정이다.
니체를 살로메에게 소개한 파울 레와 니체, 그리고 살로메. 세 사람은 마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남성 두 사람은 서있고, 살로메는 채찍을 들고 앉아 있다. 남성이 마차를 끄는 말이라는 설정이다.

세 사람의 ‘성관계 없는’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는데 살로메는 이 관계를 삼위일체관계라고 불렀다. 이 관계도 살로메가 니체의 청혼을 거절하면서 깨지는데 살로메는 ‘끼있는’ 여인이 아니라 뭐든지 듣고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학습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녀가 만난 많은 남성들은 9개월만 만나면 책을 쓴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니체는 살로메와의 만남 이전에도 저서가 있었지만 불후의 명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살로메와 만난 후에 쓴 책이다.

니체가 유럽 지성인 사회에서 조금 씩 이름이 알려질 무렵 덴마크 철학자 브란데스는 처음으로 니체를 대학강단에서 소개했지만 실제로 니체를 철학계에 스타로 키운 사람은 루 살로메였다. 루 살로메는 33살의 나이에, 그러니까 니체를 처음 만난지 12년만에 그리고 니체가 정신병원에 있을 때, ‘니체의 작품으로 본 니체’를 펴냈다. 우리 말로는 ‘살로메, 니체를 말하다’(책세상)로 번역되어 있는데 역자 김정현은 이 책을 ‘서양정신사 최초의 니체 철학 소개서’라고 평가한다.

앞서 말한 브란데스가 니체의 철학을 ‘귀족적 급진주의’라 불렀다면 살로메는 자신의 고통과 치유의 과정 속에서 인류를 위한 새로운 인식과 자기 구원의 영적 길을 제시한 종교 사상가였다. 아버지 부재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찾으려던 노력들을 볼 때 그는 분명 종교 사상가였다. 누구보다도 살로메가 정확히 분석했다. 그녀를 향한 니체의 유일한 제자였다는 호명은 틀렸다. 살로메는 니체를 낳은 어머니였고 아버지였고 동시에 스승이었다. 역자 김정현의 말처럼 “니체의 영혼을 뒤흔들며 그의 사상이 산출되는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니체가 새로운 종교이 예언자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는 많은 영웅을 제자로 삼는 사람이 될 것이다. (루 살로메의 일기 중에서) 

어빈 얄롬의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임옥희 옮김, 필로소픽)는 살로메가 니체를 정신분석학의 기초를 놓은 브로이어에 소개하면서 브로이어와 니체가 상호 상담을 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살로메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아픈 니체를 브로이어에게 데려간 것으로 어빈 얄롬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권력의지’, ‘초인’, ‘영원회귀’ 등 남성적 용어를 쏟아내던 니체는 결국 브로이어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요제프 브로이어는 프로이트에 비해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정신분석학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개연성이 있는게 브로이어의 제자인 프로이트와 살로메의 만남으로 프로이트는 니체사상에 다가 갈 수 있었다. 살로메는 이를 계기로 여성 최초로 정신 분석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살로메의 분석처럼 니체 철학은 영적이었다. 그것이 니체 당시에는 반기독교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니체가 발견한 아버지의 빈자리는 라캉을 거쳐 들뢰즈와 지젝에 와서 기독교와의 공통분모가 만들어 졌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끼친 겨우 5년의 영향력이, 4대째 루터교 목사집안이라는 분위기도 작동했지만, 그가 위대한 철학자로 성장하는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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