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가 된 목사의 딸은 행복했을까?
비구니가 된 목사의 딸은 행복했을까?
  • 김기대
  • 승인 2023.02.01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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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자녀 열전)김일엽을 보면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떠오른다

충청남도 예산의 수덕사는 비구니를 위한 선방이 있어 비구니 사찰로 유명하지만 불교 문중 힘깨나 쓰는 덕숭문중의 본사이기도 하다. 남성 승려인 비구의 숫자가 훨씬 많다는 이야기다. 덕숭문중보다 비구니 사찰로 유명해진 계기는 가수 송춘희가 부른수덕사의 여승때문일 것이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온 잊을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산길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대중음악의 노래말을 쓰는 사람들에게 비구니는 사랑에 실패한 사연을 안고 출가한 사람들로 보였던게다. 하지만 구도에 나서는 길에 남녀노소 없이 사연없는 나섬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도 사연의 하나인 것은 부정할 없다.

수덕사가 비구니 사찰로 유명해진 것은청춘을 불사르고 시인 김일엽(1896-1971) 덕이다. 1933 출가한 김일엽은 문필활동을 계속해 마지막 책인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1965)’ 이르기까지 속에 비구니의 삶을 잠깐 잠깐 소개해 왔었다. 송춘희의 노래말이 김일엽을 염두에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김일엽의 사랑 이야기에는 극적인 요소가 많다. 1918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인 이노익과 결혼했으나 1921 이혼했다. 1929 대처승인 하윤(- 이름이 하윤이라는 기록과 하윤실이라는 기록이 혼재한다) 재혼했으나 1933 다시 이혼하고 출가했다. 이노익과 헤어지고 하윤() 만나기 사이에 김일엽은 일본 은행계 명문가의 후손 오타 세이죠와 사이에서 아들을 출산하는데 일제 강점기 일본 명문가의 아들과 부모를 일찍 여읜데다가가 결혼 경험이 있는 조선 여성과의 결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엽은 아들을 다른 곳에 맡긴 하윤() 만났다가 이혼 스스로가 비구니의 길에 들어섰다.

훗날 아들의 존재를 알게된 일엽의 스승 만공(滿空) 아들을 라훌라(Rahula) 불렀다. 라훌라는 고타마 싯달타(석가모니) 출가 샤키아 왕국의 왕자일 낳은 아들의 이름이다. 이는 왕가의 귀한 이름이 아니라 수행을 방해하는 존재라는 뉘앙스를 지닌 이름이다. 라훌라가 성인이 되어서 다시 엄마(일엽) 찾았을 일엽이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구도는 이토록 냉혹한 길을 걸어야만 완성되는가?

김일엽(金一葉) 본래 이름은 원주(元周)였다. 평안남도 용강에서 목사 김용겸의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목사가 되기 한학자(漢學者)였었다는 회고가 있을 뿐이다. 일엽의 글을 종합해 보면 다섯 남매의 장녀로 태어났지만 그가 어릴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도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영향으로 기독교 학교인 구세학교(구세군), 삼숭여학교(감리교), 이화학당을 거쳤지만 어린 나이에 닥쳐오는 비극을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하기는 쉽지 않았을 , 그는 1922년 초 '조선불교청년회'에 가입한다. 

 

아내를 잃은 김용겸은 남편 소생 아들 작은 아들만 데리고 나온 하은총이라는 이름의 과부와 재혼한다. 아마도 아들은 하은총의 시댁에서 장손으로 키우려고 했을 것이다. 두고 아들이 한국 야당사의 거물로 8 국회의원을 지낸 정일형이다. 한국 최초의 여자 변호사면서 여성 인권운동에 앞장 섰던 이태영변호사의 남편이자 정대철 전의원의 아버지다.

김일엽의 생모 이름이 '이말대'고, 정일형과 이태영의 주례를 선 이윤영의 아내 '이마대'는 하은총과 외사촌간이다. 이말대와 이마대 이름이 비슷하다. 그러면 하은총은 또다른 외사촌 언니 이말대의 남편 즉 외사촌 형부인 김용겸과 결혼한 것일까? 이말대와 이마대 이름으로 추정한 것일뿐 그 족보까지는 알려진게 없다. 

정일형(아버지 정기찬) 정씨 집안에서 맡아 키웠기 때문에 김일엽과 함께 성장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의붓 남매인 셈이다. 김용겸은 하은총과 재혼한 얼마되지 않아 김일엽이 10 후반일 별세한다. 일엽은 인생의 무상함을 너무 일찍 경험했다.

김일엽은 1920 창간된폐허 동인으로 글을 기고함으로써 문학의 길에 들어 섰다.  폐허 문학사조가 퇴폐이듯이 일엽은 25살의 나이에  퇴폐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동시에 같은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신여자(新女子)’ 편집 주간을 맡아 일했다. 나혜석(화가), 박인덕(여성운동가, 인덕대학 창립자), 김활란, 차미리사(덕성여대 창립자) 등이신여자 함께 했다.

박인덕은 이혼하면서 남편에게 위자료를 최초의 여성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박인덕과 김일엽은 평안남도 용강 출신으로 비슷한 나이에 삼숭학교도 함께 다녔다. 이들 신여자들은 '신여자 선언'을 발표했다.

 

... 세기를 두고 우리 여자를 사람으로 대우치 아니하고 마치 하등동물과 같이 여자를 몰아다가 남자의 유린에 맡기지 아니하였습니까?... 우리는 신시대의 신여자로 모든 전설적인 일체의 구상상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여자' 임무요, 사명이요, 존재의 이유로 삼는 것이올시다.

 

일엽은 시대적 금기어인연애의 자유 설파했다. 미국 유학파인 첫 남편 이노익과 일엽은 20 정도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했으나 그의 의족(義足) 문제였다. 결혼 전에 남편의 장애를 몰랐던 것은 아니나 신혼방 구석에 놓여 있는 의족을 젊은 일엽은 견디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노익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도 가고, ‘신여자 시작했지만 이노익에게서 마음이 떠나 버렸다.

한국문학사에서 탐미주의자로 분류되는 임장화와 일본에서 동거했으며 춘원 이광수와도 관계가 있었다. ‘일엽 이광수가 일본의 작가 히구치 이치요 (樋口一葉)처럼 한국의 이치요(일엽) 되라고 붙여준 이름이었다. 앞서 말한 오타 셰이죠와 아들을 두었고, 귀국후 임장화와 다시 동거하다가 헤어지고 후에도 여러 남자와 사랑을 나눴다.  승려로서 독일 유학파 출신의 불교학자 백성욱도 김일엽의 이력에 스쳐 지나간다.  

그의 사생활을 두고 작가 김동인이 비아냥 거릴 정도 였으니 세간의 대단한 화제거리였던 것 같다. 김일엽은 보란듯이 1927 1 8 조선일보에 논설나의 정조관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재래의 정조관으로 말하자면, 정조를 물질시하여 일단 과거를 가진 여자의 사랑은 신선한 맛이 없는 진부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정조를 잃은 것을 마치 어떤 보옥으로 만든 그릇이 깨어져서 못쓰게 되는 것같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조란 그런 고정체가 아닌 것입니다. 정조는 어디까지나 사랑이 있는 동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위의 글을 쓴 1년 뒤인 1928년 만공으로부터 수계를 받았지만 곧장 비구니의 길을 걷지 않고 이번에는 대처승 하윤() 재혼했다가 이혼 모든 남성을 뒤로하고진짜로출가했다.

김일엽을 보면 우물가에서 예수와 대화를 나눴던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난다. 예수는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며 지금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고 몰아 부쳤다. 여인은 순간 예수가 예언자라는 알아봤다. 고대사회에서 남성은 여성의 주인이었다.

현재도 일본에서는 남편을 고슈진( 主人)이라 부른다. 그냥 주인이 아니라 고슈진 주인님이다. 이제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항변하는 2017 여론 조사에서도 아직 23% 고슈진이라고 부르고 있다. 21세기를 맞은지 20년이 되도록 다섯 쌍의 이상이 남편을 주인님으로 부른다.

남편(주인) 찾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의미다. 예수는 여인에게서 주인을 찾아 왔지만 찾지 못했던 애타는 눈동자와 떨리는 목소리를 느꼈을 것이다. 이제 영원한 생수를 주겠다는 예수의 말에 여인은 감동하고 자신을 천대하던 마을로 달려가서 예수를 만난 기쁨을 알렸다.

김일엽에게 주인은 무엇이었을까? 연이은 가족의 비극을 겪으면서 ‘주님과는 일찌감치 결별했여성 해방’ ‘퇴폐적 낭만’ ‘사랑’ ‘자유' '문학' 등 새로운 의미를 찾아 방황하며 젊은 날을 보냈다. 어느 것도 그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여성해방을 설파하던 그의 글은 주제는 묵직했지만 필력이 주제의식을 따라 가지 못했으니 문학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스스로가 주인이 되겠다는 결단으로 30대 후반의 나이에 비구니가 되었다. 그는 정말 행복했을까? 불교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는 근본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다. 남성편력으로 인한 세간의 비난을 견뎌가면서도 용기있게 여성운동가, 사회 운동가로 남았으면 시몬 보부아르처럼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에서 묻는 것이다. 

오랜 나혜석이 비구니가 되려는 그에게현실 도피로 종교를 택하는 일은 어리석다 반대했는데 나혜석의 말에 전혀 근거가 없었을까? 때문인지 나중에 오히려 나혜석이 비구니가 되겠다고 하자 김일엽이 반대했다고 한다.

아들도 기구한 삶을 살았다. 그는 남북한, 일본 모두에서 환영받지 못한 라훌라, 송영업, 김태신으로 불리다가 결국 출가해서 일당(日堂)이라는 법명으로 살다가 별세했다.

인터넷에는 김태신의 이름으로 자전 소설어머니라 부르지 마라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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