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선주 목사 세 아들의 엇갈린 운명
길선주 목사 세 아들의 엇갈린 운명
  • 김기대
  • 승인 2022.09.06 03: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목사 자녀 열전(6) 북으로 간 막내 길진섭

길선주 목사는 여러 면에서 한국 교회의 문제적 인물이다. 그에게 덧씌워진 한국 근본주의의 효시라는오명에서부터 새벽기도의 창시자, 기미년 독립선언이 낭독되던  자리에 없었던 33 한사람으로 행적 때문에 33 가장 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인물 등등.

왼쪽은 1955년 길진섭이 그린 어머니 초상, 오른 쪽은 1934년 길진섭의 자화상이다. 반항적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왼쪽은 1955년 길진섭이 그린 어머니 초상, 오른 쪽은 1932년 길진섭의 자화상이다. 반항적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반면 그에게 의외의 면도 적지 않다. 길선주는 고려말 충신 야은 길재의 19 손으로 전통적인 유교 문인 집안의 후손이었다. 패망한 고려의 도읍지를 보고 시조고려유신 회고가 짓고, 고려말 절기를 지킨 3(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 사람이 길재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김익두 이기풍 처럼 건달 생활을 하다가 급격한 회심을 경우와 달리 조선의 운명과 절대적인 힘을 놓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19 때는 삼국지의 관우를 섬기는 관교(關敎) 빠져들어 신비체험을 하기도 했다. 조선의 운명이 바람앞의 촛불 같은 때에 사람들은 관우처럼 강한 초인을 기다렸을 , 게다가 관우의 ()빗장 아니던가! 침략을 막아내는 단단한 빗장을 치고 싶었던 고종은 1880 관교의 경전인 과화조신(過化存神), 삼성훈경(三聖訓經), 1883년엔 관성제군오륜경언해(關聖帝君五倫經諺解) 간행한다. 거의 국교급의 위상을 부여한 셈이다.

도교 수행에도 심취해 직접 만든 선약(仙藥) 먹고 거의 실명상태에 이르기도 했던 길선주는 1897 선교사를 만난 뒤에 기독교로 개종한다. 전통적인 유학자 집안이지만 유학으로는 조선의 운명을 구원할 없다고 생각한 그는 진리를 찾아 방황하다가 마침내 그의 나머지 인생을 걸었던 곳에 안착했던 것이다. 1898 안창호와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창립했고, 1907 평양대부흥회를 이끈 그는 평양 장대현 교회를 부흥시키면서 이름을 날렸지만 그의 의식에는민족 먼저 자리잡고 있었다.

길선주는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장남 길진형의 행보를 보면 아버지의 영향력을 확인할 있다. 길진형은 1911 105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길진형은 출감 1913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로스엔젤레스에 국어 강습소를 개설해서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지병을 얻어 귀국한 얼마 되지 않은 1917 사망했다. 나이 30 되기 전이었다.

일은 길선주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33 장로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천도교를 대표한 손병희 다음에 두번째로 이름을 올리고도 모호한 태도를 보였던 것도 장남의 죽음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길선주는 현장에는 없었지만 뒤늦게 체포되어 투옥생활을 하면서 요한계시록을 1 회나 독파했다고 한다. 그에게민족 사라지고말세 남는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요한 계시록에 기초한 말세론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1927 장대현교회와 결별하고 순회 선교사의 길을 걷다가 1935 설교 도중 쓰러져 6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다행히(?)’ 일제의 신사참배 압박이 있기 전이었다.

차남인 길진경 역시 3.1운동 이후 1년간 옥살이를 했고, 아버지를 이어 평양신학교를 마친 목사가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서영계 길선주 전집 편찬했다. 길진경은 기독교 장로교 소속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예수교 장로교를 택할 법도 한데 그는기장 택했다. 기장과 예장 분열 초기에는 지방색(예장 평안도 세력, 기장 함경도 세력) 강했는데 평양 출신인 그의 행보는 여러 면에서 도드라 진다. 1960년 기독교장로회 총회장, 1961년 한국기독교연합회 총무로 활동했는데 이 때는 WCC(세계 교회 협의회) 가입문제로 예장 통합과 합동이 막 분열되던 시기였다. 그는 총회장과 총무로 일하면서 WCC가입을 말끔하게 처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 교회의 문제적 인물 길선주의 문제적 아들은 3남 길진섭이다. 일본 도쿄미술학교 유학시절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적이 있으나 1932년부터 일제가 이 전람회를 주관하게 되자 출품을 거부, 화가 김용준 등과 '목일회'를 결성했다. 길선주 목사의 세 아들 모두 기개가 대단했다.

1937년 고향 평양에서 첫 개인미술전을 열었고 그의 작품들은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는 조선 민중의 생활상을 화폭에 잘 담아낸 것으로 평가받았다. 길진섭은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1946년 이승만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을 모아 ‘조선조형예술동맹’을 조직,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길진섭은 북한의 사회상에 대한 그림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한다. 그 중 '심령목장에서'(1955)는 "인민을 믿고 그 힘에 의거하여 전후복구건설도, 사회주의건설도 하신 어버이 수령님의 위대성과 한없이 소박하고 겸허하신 품성을 사실주의적으로 생동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통일신보>(2014년 12월)는 평가했다.

 

사진출처,통일신보
'심령 목장에서', 사진출처,통일신보

 

<통일신보>의 표현처럼 ‘사실주의 유화발전에 기여한 화가’ 길진섭은 1960년대에도 계속 북한 지도자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일제하에서 반일 예술 활동을 하면서 보여주었던 기개는 이 시기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가 김일성 정권을 전적으로 지지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도록(圖錄)을 보면 지도자에 대한 집중이 지나쳐 예술가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이런 작품활동에도 불구하고 길진섭의 사망년도가 알려져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그가 ‘인민 화가’로 생을 마감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북한행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남한에 남았어도 ‘조선조형예술동맹’ 경력 때문에 이승만 정권에서 학살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식민지를 거쳐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한국 전쟁의 시기에 저항적 지식인들의 선택지는 너무도 적었다. 선택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냥 비극이었다.

길진섭은 ‘향수’의 시인 정지용과는 매우 절친해서 그의 시집 두 권(‘백록담’, ‘정지용 시집’)의 표지를 그려주었고, 시인 이상이 1937년 죽었을 때 이상의 데스마스크(death mask)를 떠 줄 정도로 절친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아일보의 청탁으로 길진섭과 정지용은 여행기를 싣는다. 정지용은 글로 길진섭은 그림으로 했던 공동작업인데 아래 글에서 길진섭의 사유가 잘 드러난다.

평양에 내린 이후로는 내가 완전히 길(吉)을 따른다. 따른다기보다는 나를 일임해 버린다. 잘도 끌리어 돌아다닌다… 누구네 집 안방 같은 방 아루깐 보료 밑에 발을 잠시 녹였는가 하면, 국숫집 이층에 앉기도 하고, 낳고 자라고 살고 마침내 쫓기어난 동네라고 찾아가서는 소낙비 피해나가는 솔개처럼 휘이 돌아오기도 하고, 대동문턱까지 무슨 기대나 가진 사람같이 와락와락 걸어갔다가는 발도 멈추지 않고 홱 돌아서 온다.<1940년 동아일보 ‘화문행각(畵文行脚)’ 중에서>

여기서 길(吉)을 따른다는 말은 중의적이리라! 길씨 성을 가진 진섭을 따라 길(道)을 나섰는데 오랜만에 평양을 찾은 길진섭이 유년기를 보낸 평양에서 보여준 행보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고 정지용은 쓰고 있다. 그만큼 평양에 대한 애증이 교차했다는 말인데 몇해전 사망한 아버지와 그의 나이 10살 때 죽은 큰 형에 대한 생각이 이 날 길진섭의 평양 행보를 지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길진섭은 어머니의 초상은 남겼지만 아버지 길선주 목사에 대한 초상은 남기지 않았다. 자유로운 예술가의 삶과 좌파적 성향을 두고 아버지와 엄청난 마찰이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근본주의자’ 길선주의 세 아들의 운명은 이처럼 엇갈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 아들 모두 가졌던 반골과 기개의 정신은 아버지로부터 나온 것이 틀림없다. 세 아들을 통해 길선주 목사를 다시 이해하고 싶어지는 지점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