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를 믿사오며"
"네트워크를 믿사오며"
  • 지성수 목사
  • 승인 2022.07.02 0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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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수 목사 칼럼] 온라인 사도행전(2)

나는 6.25 내전으로 풍비박산이 나고 준 전쟁고아 상태에서 부모의 관리를 받지 않고 자유로운 프리레인지(방목 상태)로 자랐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사람이 중요했다. 나는 좋은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으로도 움직이지 않지만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아무리 먼 길도 마다하지 않는 편이다. 사람을 찾아가는 시간과 돈은 아끼지 않지만 가까이 있는 자연도 돈 들여 찾아가지는 못하는 구제 불능의 인간지향적인 기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좋은 일도 나 혼자 좋으면 별로 재미가 없고 남들과 같이 좋아야만 즐거운 편이다. 한 마디로 사람이 없으면 못사는 제품이다.

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먼저 내가 상대방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내가 도움이 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이 사람이 누구와 연결되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네트워킹을 맺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금은 어디에 가나 Wi-Fi 신호를 찾아야 하는 시대이다. Wi-Fi 가 없으면 살 수 없듯이 한 인간이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려면 네트워크가 필요한 세상에 사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정말 급한 경우 아니고는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 나는 입으로 하는 기도와 행동으로 하는 기도의 차이는 트럭에 싣고 다녀야 하는 짐바브웨 달러와 지갑에 넣고 다닐 수 있는 미국 달러의 차이만큼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서 가능하다면 상대방을 더 넓게 보고 깊이 생각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하도록 돕는 것이 목표이다. 그렇다면 내가 상대방보다 더 넓고 깊고 높아야 한다. 더욱이 나이를 먹을수록 만나는 이들에게 무엇인가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을 늘 가지고 살고 있다. 나로서는 주변 사람들과 성실하고 진실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목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지만 나와의 관계에서 진지함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즉 목회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을 이렇게 고쳐서 믿는다.

“인간의 근원이시고 모든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사오니 내 속에서 에너지를 끌어내는 원천이고, 모든 관계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성령이 교통하심을 믿사오며’라고 하지만 나는 성령의 역사는 잘 몰라도 교통하는 네트워크의 역사는 알기 때문이다.

예수도 인간이 하나님과 어떻게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즉 예수와 네트워크를 맺어야 하나님과 네트워크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무당이란 영매(靈媒)라 하여 영혼과 인간을 매개하여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진짜 무당은 아무런 과정 없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남 보다 더 큰 고통, 남이 겪지 않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어야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처럼 산전수전, 공중전, 한국전, 월남전, 온라인전 다 거친 사람은 그런대로 무당이 될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을 퀘이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을 입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도 실제적이지 못하고 관념적 추상적 내용은 더욱 어색하다. 더욱이 짜증나는 일은 믿는 것을 가지고 다투는 일이다. 양심의 자유가 있는 민주사회에서 남이야 무엇을 어떻게 믿던 상관할 바가 아닌데 기독교인은 믿는 것을 가지고 싸운다. 솔직히 나는 아둘람도 신앙 때문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한다.

다행스러운 일은 아둘람도 점점 발전 변화해서 네트워크가 생겨서 역동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역동 다음에는 생산성이다. 아둘람 구성원들 각자의 소질과 역량이 네트워크를 통해서 역동적 에너지로 발산될 수 있을 때 기독교인이 믿는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을 굳게 믿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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