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공동체 / 온라인 사도행전(10)
진화하는 공동체 / 온라인 사도행전(10)
  • 지성수 목사
  • 승인 2022.12.24 02: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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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평신도 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아둘람은 지난 3 년간 계속 진화해 왔다. 이름도 '아둘람온라인교회'로 했다가 ‘교회’가 아닌 ‘공동체’로 바꾸었다. 즉 새로운 '온라인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면을 해도 공동체성을 갖기 어려운데 비대면 상황에서 어떻게 공동체성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과제였다. 공동체는 서로를 아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 서로를 알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구체적으로 타인의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생활 영역을 침해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서로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공동체에서는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도원 안에서도 날마다 크고 작은 갈등이 벌어진다. 따라서 공동체 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긴장된 생활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마치 태권도 선수가 대련을 통하여, 권투선수가 스파링을 통하여 강해지듯이 영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한 형제의 경험이다.

어려서부터 보수 신앙을 추앙하는 합동 장로교회에서 자랐습니다. 나름 자부심이 강한 교회입니다. 저를 가르친 분이 총회장까지 하셨으니까요. 그런 상황과 환경이 저를 '진리로 자유함을 누릴' 자로 만들어 주는 줄 알고 살아왔었습니다, 아둘람을 알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닌-최소한 제가 겪는 상황에서는-거센 물결이 저를 자연스럽게 이 모임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습니다. 가장 커다란 변화는 제가 이제는 주변 상황에서 한 곳만 주시하는 뻣뻣한 신앙인이 아닌 "중도"가 무엇인지 조금은 맛보고, 실천할 수 있는 상황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다원주의자'들이 아니냐는 생각도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명칭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 이런 상황이 "다양성안에 존재하는 일치함"이라 생각합니다. 서로가 가진 시각이 "틀린"것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시도라고 생각하고 받아드리고 그 안에서 평안함을 맛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진보'란 오히려 '중도'라는 균형 있는 단어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중도'야 말로 진리를 향하여 진일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회원이 '창조는 설화이다'라는 의견을 꺼냈을 때 속으로 적잖은 반감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내가 가진 신앙의 뿌리에서 최소한 내가 부정하지 말아야 하는 어느 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겁니다. 그 근거는 내가 지금까지 교육받았던 신앙 교육이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고-어느 한 구석에는- 더불어 내가 체험했던 신앙이 나를 든든히 떠받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이지 않은 경험도 신앙에서는 어느 정도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 제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다양한 분들의 신앙 경험, 인생 경험이 이런 모든 상황들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분들이 모입니다. 저처럼 '노가다'하는 사람, 전직 목사님들(?), 교회주의 내지는 목사 중심의 교회에 환멸을 느낀 분, 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 그리고 받으시려고 공부하시는 분, 농사지으시는 분, 가정주부 그리고 여장부들 몇 분.... 제가 이런 분들과 같이 의견을 나누고, 감히 반론도 때로는 동조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너무 좋습니다.

그 분들의 경험과 지식을 내 경험으로 치환하고 받아들이기 좋은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아둘람은 그런 곳입니다. 누구 하나가 이것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라, 진리의 대상을 가리키는 방향이 다양함을 인정하고 그 끝이 우리가 함께 도달해야 하는 목표임을 인정하고, 같이 걷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한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아둘람의 토론 모습을 외부인의 시각으로 보면 자기 주장이 강한 곳으로 보일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답보다는 질문이 있어야.

기존의 신앙생활의 문제점은 질문이 없고 모범답안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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