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는 왜 창씨 개명을 했을까? 그리고 요셉은?
윤동주는 왜 창씨 개명을 했을까? 그리고 요셉은?
  • 김기대
  • 승인 2024.02.0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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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의 책과 50편의 영화로 읽는 창세기) 누구는 불편하고, 누구는 애잔하고

요셉은 이집트 땅에서 승승장구 하면서 이름을 이집트 식으로 바꾼다. 사브넷바네아 이름 뜻으로만 보면신이 말씀하신다이니 일종의 세례명처럼 받아들일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기서이란 배타적 여호와가 아니라 모든 신들의 통칭이다. 게다가 요셉의 아내는 종교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아스낫이다. 요셉은 꿈의 사람, 출세한 사람, 가족을 용서한 사람 등등 무오류의 사람처럼 찬양되는데 근본주의적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용인할 없는 부분이다.

일제 강점기의 상처를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창씨 개명은 친일의 다른 이름이다. 본래 일본은 강점기 초기에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을 금지했었다. 내지(일본)인과 '감히' 같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징병과 징용이 필요한 일본은 이름을 고치게 함으로써 조선인으로 하여금영광스런 일본인이 되어 조국에 충성하라는 의도, 징집의 명분으로 삼았다.  1940 2 11 창씨 개명이 발표되었다. 그해 5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시골에서는 민중에게 일본명을 짓게 하기 위해 지방의 경찰, 관리, 면장이 강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 집을 짓거나 필요한 허가도 신청서에 일본명이 적혀 있지 않으면 관리들은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소학교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아이들도 곳에 따라서는 이름이 일본식으로 바뀔 때까지 호적증명을 얻을 수가 없다"라고 적었다. (미즈노 나오키 지음, 정선채 옮김, '창씨 개명-일본의 조선지배와 이름의 정치학’, 산처럼)

조치를 환영하는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되고 싶은 친일파들이었다대표적인 인물이 소설가 춘원 이광수다. 춘원은창씨 개명 무용담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창씨와 개명을 굳이 설명까지 했다. “일본을 건국한 ‘신무천황이 어즉위하신 향구산의 향산(香山) 따서 씨로 삼았고, 광수의 光자와, 일본식 이름인 郞자로 해서 향산광랑이라고.

일제 강점기 만담가(요즘의 개그맨) 신불출의현전우일로의 창씨 개명은 일본을 향한 조롱의 행위였다.

‘현전우일’이 일본어인 ‘畜生(축생)’의 파자(破字)라는 대사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畜’은 ‘玄+田’이요, ‘生’은 ‘牛+一’이 아닌가. ‘畜生’을 파자하면 ‘현전우일’이 되는 것이다. ‘축생’은 일본에서 ‘칙쇼(ちくしょう)’라는 욕설이다. ‘칙쇼’, ‘축생’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뜻이다. 신불출은 조상이 소중한 이름을 버리고 창씨를 강요당했으니 스스로를 ‘짐승만도 못한 놈’으로 일컬었다는 것이다.(이기환, 창씨 개명의 얼굴, 경향신문 2019 3 20)

윤치호 일기에 나오듯이 학교 진학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창씨 개명을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서정시인 윤동주다. 윤동주는 독립운동 혐의로 구속되어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으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았다. 그의 일본 이름은 히라누마 도쥬(平沼東柱). 윤동주 연구가들은 자신의 본관인 파평(坡平)에서 '' 가지고 듯하고, 파평 윤씨의 시조가 연못에서 나왔다는 설에서 '()' 가져온 것 같다고 추정한다

동그라미 표시가 윤동주고 세모 표시가 송몽규다
동그라미 표시가 윤동주고 세모 표시가 송몽규다

 

그는 유학 직전인 1941 12 개명을 하는데 전에 시가 ‘별헤는 밤’이다. 거기는 유난히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소학교 책상을 같이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 (), ()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이름자를 보고,/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윤동주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는 했지만 개명의 부끄러움을 시로 남겼던 것이다.

고전 문학 교수이면서 소설가인 유광수는 자신의 소설 윤동주 프로젝트’(휴먼앤북스)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윤동주의 죄목이 독립운동인데 조사 기록에는 구체적인 운동 내용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윤동주의 고종 사촌 송몽규는 김구밑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건 소설적 창작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17 나이에 남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 장교 양성 2기생으로 훈련을 받았다. 김구와 인연을 맺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사실을 좀더 확장시켜 백범 김구가 윤동주에게 천황 암살을 지시했다는 허구를 만들어 내었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일본행이 급했던 윤동주는 2년여 동안 창씨 개명을 안하고 있다가 마침내 했던 것이다. 일본에 건너간 윤동주는 일본 천황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사랑하는 여성을 이용해서 정치적 목적을 이룰 없어 번민하던 차에 구속되었다. 천황 암살은 그 자체만으로도 불경이니 그냥 뭉뚱그려 윤동주의 죄목에 독립운동이라고 넣었다는 것이다.

다소 황당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사건은 하나의 플롯일 뿐이고 한일의 뿌리깊은 우익 집단의 배후를 밝혀나가는 것이 기본 줄거리다.

창씨개명을 반대하다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고창의 의병출신 설진영은 창씨개명을 반대하다가 하는 없이 자식들은 창씨 개명을 시키고 본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야기는 일본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가족보라는 소설로 발표했다.  1979 한국에서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고 작고한 배우 주선태가 설진영역을 맡았다. 영화는 한국 영상 진흥원 유투브에서 무료로 감상할 있다.

요셉은 어느 경우에 해당할까? 파라오로부터 하사받은 이름일 수도 있다. 그는 저항없이 개명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처럼 창씨개명이라는 동일한 사안도 다양한 상황에 따라 호불호가 엇갈린다. 그런 점에서 창씨개명이 무조건 친일 행위라고 단죄할 없다. 부끄러움을 몰랐던 가야마 미쓰로(이광수) 불편한 이름이고 구로다 규이치(신불출) 통쾌한 이름이다. 창씨개명에 힘들어하던 히라노마 도쥬(윤동주)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처럼 우리가 숨겨주고 싶은 이름이다.

꿈과 용서의 사람 요셉은 권력에 오른 (이름을 바꾼 )에는 돌변한다. 오래 가뭄으로 바닥이 갈라진 논을 값에 사들이고 비축된 곡식을 팔아 돈을 국고에 다시 넣었다. 국고는 풍족했지만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갔다.

그래서일까? 성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말하되 요셉의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 17세기 철학자 파스칼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철학적 주제로 삶았다. 키르케고르는 ‘하나님 앞에서 있는 단독자(개인)’라는 표현을 통해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주목한다.

요셉은 세속에서 성공했지만 성서 기자들은 그의 이름에 냉정했다.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불러 주지 않았던 것이다. 세속에 물든 현대 크리스천들이 새겨야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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