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팔레스타인은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팔레스타인은
  • 김기대
  • 승인 2023.10.18 09: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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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읽는 창세기) 하마스 이스라엘 충돌, 해법은 없는가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그곳은 팔레스타인 땅이다#  이삭은 족장이라는 지위에 비해 창세기에서 출연 횟수가 적은 인물이다. 창세기 12장에서 25장까지의 주인공이 아브라함이었다면 25장 후반부터는 이삭이 아니라 그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야곱과 에서의 임신을 소개한 창세기 25:19-28과 야곱이 이삭을 속여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는 27장은 그대로 연결된다. 26장은 출연 ‘분량’이 적은 이삭을 위해 삽입된 장이라는데 구약학자들의 의견이 대체로 모아지고 있다. 이삭이 제물로 바쳐질 뻔 했던 창세기 22장에서도 이삭보다는 아브라함이 돋보였다. 유일하게 26장에서만 이삭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26장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서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이야기와 같은 구조로 시작한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누이라고 속인 사라를 취했다가 돌려보내는 일이 있었다. 이삭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아브라함의 그런 과거가 있는 그랄 지역을 다시 찾는다. 그러나 26장에서 아비멜렉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게 흑심을 품지 않는다. 사라를 취했을 때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기도 했겠지만 아비멜렉은 혹시라도 자신의 부족민들이 자신과 동일한 죄를 지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과거를 거울삼아 이방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 아비멜렉과 목숨을 잃을까 거짓말을 하는 이삭이 대조된다.

다음은 이삭이 우물을 파는 이야기다. 크게는 가나안 땅에 속하지만 어쨌든 이삭의 본고장이 아닌 그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긴 이삭은 이방인 신분이지만(26:3) 그곳에서 우물을 판다. 그랄 지역의 목자들과 다툼으로 그가 판 2개의 우물은 에섹(다툼), 싯나(괴롭힘)라는 이름만 남겨둔 채 이삭은 다른 곳에 세번 째 우물 르호봇(넓어짐)을 판다.

성서 고고학에서 르호봇은 브엘세바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와디 루헤베(Wadi Ruhebe)를 가리킨다고 본다. 와디란 중동 지역에 있는 사막 속의 강들을 일컫는 말이다. 비가 내리면 단번에 물난리가 나고 비가 그치면 곧바로 물줄기가 말라버려 물 흐르는 흔적만 남게 되는 물없는 강이 와디다. 경우에 따라 와디 깊숙한 저변에 물줄기가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물이 용솟음치던 르호봇, 브엘세바는 그런 곳이었다.

아무튼 애써 판 우물을 포기하고 새로운 우물을 찾던 이삭의 온유함이 결국 블레셋 왕 아비멜렉을 감동시켜 두 세력은 평화조약을 맺는다. ‘이삭의 우물’이라는 용어 자체가 성서에 나오지는 않지만 창세기 26장에 제목을 붙이자면 ‘이삭의 우물’이 된다. 구글에서 한국말로 이삭의 우물을 검색해 보면 10만 여개가 검색된다. 영어로 Isaac’s Well을 검색하면 무려 2억여개가 검색된다.

과연 그럴까? 굳이 이름을 붙히자면 이삭의 우물이 아니라 그랄지역에 있는 그랄의 우물이다. 이삭이 판 우물은 될 수 있지만 그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다른 이들이 사는 땅에 과거의 연고를 주장해 우물을 파는 행위가 현재 거주하는 지역민들과의 싸움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선 이삭의 행위를 칭찬할 수는 있지만 그 우물을 이삭의 우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호명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는 호명(Interpellation) 이론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개인을 부르는 권위적 목소리의 효과로서 주체는 종속되고, 주체는 종속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주체라는 것이 자기 성찰과 각성에 기초한 대단한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무엇을(누구를)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다.

이삭의 우물이라는 호명에는 성서 인물들이나 세계관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무 곳이나 가서 땅을 점령하거나 우물을 파면 그들의 것이 된다는 이데올로기가 전제되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인데 그랄 지역의 우물을 이삭의 우물이라고 부를 밖에 없는 우리의 언어 생활은 땅의 점유권도 이스라엘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제한적 세계관에 머물게 만든다.

그러나 창세기의 세계관은 놀랍게도 세계관을 오히려 따르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아버지 데라의 족보로 시작해서 스마엘의 족보로 끝난다. 게다가 이스마엘의 아들도 12명이었다. 아브라함의 적자 혈육이 이스라엘의 12부족을 대표하게 된 것은 야곱 다음 세대에서야 이루어진다. 그것도 요셉의 두 아들을 ‘끼워 넣기’ 하고 나서야 12부족이 완성되었다. 이처럼 성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적자 계승을 뒤늦게 완성시켰다. 적자와 이스마엘의 갈등 관계가 후대에 갈수록 악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가문이나 아랍족까지 포괄하는 세계관을 통하여 그분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가자 지구에 있는 Al Ahli 병원에 있던 500여명이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알자지라 웹사이트 갈무리(10월 16일)
가자 지구의 Al Ahli 병원에 있던 500여명이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알자지라 웹사이트 갈무리(10월 16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중동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다. 전쟁의 원인으로 항상 동원되는 음모론이 ‘정론’을 대신한다. 사법 리스크에 몰린 현직 이스라엘 극우 총리 네탄야후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일을 키웠다는 ‘설’,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관계 개선 징후를 두려워 하는 하마스의 무리수라는 ‘설’, 심지어 네탄야후와 하마스의 밀약설까지도 등장한다. 무엇이 정론인지 비전문가로서는 속단할 수 없다. 다만 전쟁은 일어났고, 양측의 희생은 줄여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를 속히 되찾아야 한다.

사라와 하갈의 갈등, 이삭과 이스마엘의 적자 논쟁이 오늘날 중동분쟁의 원인이라고 ‘종교적’으로 말하지만 성서는 처음부터 갈등관계를 강조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부터 등장한 시온주의와 ‘시온의정서’같은 반유대적 가짜 문서, 석유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가 되면서 그 땅에 눈독을 들인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오늘의 판을 키웠다. 성서는 결코 이런 갈등과 대립구도를 조장한 일이 없다. 다시말해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이스라엘을 편들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프랑스의 성자로 칭송되는 아베 피에르 신부는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 사람이 있는데 그들 중 가장 힘센 자가 가장 힘없는 자를 착취하려 할 때 나머지 한 사람이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 힘없는 자를 아프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날, 하늘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있다.” 기독교인은 강자와 약자의 사이에 서야 하는 사람, 스스로 경계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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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2023-11-14 16:42:53
논리적인 비약이 있는 글이다. 이삭의 우물을 검색하여 나오는 한국말로 이삭의 우물을 검색해 보면 10만 여개너 영어로 Isaac’s Well 2억여개가 묻 또는 대부분이 그땅이 이삭의 땅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을 알튀세르는 호명 이론과 비트겐 슈타인을 인용하여서 '성서 속 인물들이나 그 세계관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무 곳이나 가서 땅을 점령하거나 우물을 파면 그들의 것이 된다는 이데올로기가 전제되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그 용어를 쓰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쓴다고 보기 어렵다. 이삭의 우물이란 용어는 땅에 대한 문제보다 그 사건이 우물에 대한 것이었음으로 이삭이 우물을 판 사건의 줄임말 성격이다. 위험한 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