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이후 갈라진 바그너파와 브람스파
베토벤 이후 갈라진 바그너파와 브람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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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2.16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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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량의 북소리는 너무 컸다

영화노량’(감독 김한민) 마지막 부분에서 이순신 장군(김윤석 ) 병사들을 독려하는 북을 계속 친다. 영화관 좋은 음향 시스템에서 울리는 북소리는 지루하며 그리고 실감나게 관객들의 청각을 괴롭혔다. 어느 프로에 나와서 북치는 장면이 너무 오래 갔다고 감독에게 패널들이 항의하자 그는 뭐라고 변명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감독의 발언이 설득력이 없었던 까닭이다.

고대 시대부터 모든 전쟁에는 음악이 동원되었다. 병사들의 죽음은 애국심이나 종교적 동기로 포장되지만 병사의 이름을 기억되지 않고 영웅만 남는다.

신화에는 많은음악가들이 나온다. 배를 타고 가는 선원들을 노래로 유혹해서 위험에 빠뜨리는 세이렌, 세이렌을 물리친 오르페우스, 여러 뮤즈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전쟁과 연관되어 있다.

6세기 교회 음악이 자리잡으면서성스러운소리로서의 음악이 대두되었지만 그것은 형태만 다를 복종의 도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교회 권력의 퇴조와 함께 음악도 해방을 맞는 했으나 바그너의 등장으로 음악은 복종과 신화를 벗어나지 못했다. 전쟁에는 적이 있고, 복종에는 저항에 따르는데 음악은 그들을 향한 혐오의 도구로 작동했다.

배후(?)에는 베토벤이 있다.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을 작곡(찬송가 64 기뻐하며 경배하세)하면서 가사를 집어 넣었다. 청각을 잃어가는 베토벤에게는 음악을 듣지 않고 읽고 싶었을 것이다. 악보는 그의 머리 속에서 소리를 끊임없이 전달했겠지만 그에게는 문자가 필요했다.

이것을 두고 다시말해 베토벤의 해석을 두고 바그너파와 브람스파가 나뉜다. 바그너는 베토벤이 가사를 집어 넣은 것을 발전시켜 음악극 분야를 개척했다. 그의 음악극은 승전과 패전이 나뉘는 신화에 집중했고 결국에 바그너는 유대인 혐오의 선봉장 같은 인물로 올랐다. 니체를 거쳐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은 지대했다. 반면 한슬리크를 중심으로 하는 브람스파는 음악은 음악이어야 한다는 절대 음악이론을 주장하며 바그너파와 대립했다.

아름다운 선율만 즐겨서 행복한 음악이 아니라 이처럼 음악에도 진영이 나뉘고 혐오가 개입한다.

가스실로 끌려갈 때도 악대가 함께 했다
가스실로 끌려갈 때도 악대가 함께 했다

 

파스칼 키냐르는 그의 음악혐오’(김유진 옮김, Franz)에서 이렇게 쓴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이다. 나치 강제수용소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 장르다. 무엇보다도, 음악이 수용소의 조직화와 굶주림과 빈곤과 노역과 고통과 굴욕, 그리고 죽음에 일조할 있었던 유일한 예술임을 강조해야 것이다.

아유슈비츠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유대인 음악가 시몬 락스는 어쨌든 살아 남았다. 파스칼 키냐르는 만약 피카소가 아우슈비츠에 있어도 죽었을 터인데 시몬 락스가 살아남은 이유는 그가 지휘자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음악은 나치에 복무하기 가장 좋은 예술이었던 셈이다.

이탈리아의 작가 프리모 레비는 처음 수용소에 입소했을 연주되었던로자문데’(슈베르트 ) 듣고 조소를 참을 없다고 했다. 무력한 인간들의 다리는 자의와 상관없이 시몬 락스가 지휘하는 리듬의 강요에 복종하고 있었다.”(파스칼 키냐르)

프리모 레비에게 아니 글을 남기지 못한 많은 아우슈비츠 희생자 전부에게 음악은 혐오였고 지옥이었고 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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